소년 블라디미르 푸틴의 꿈은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이 되는 것이었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던 평범한 아이 푸틴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한 편의 영화였다. '창과 방패'라는 스파이 영화였는데, 군대도 못 하는 일을 혼자 해치우는 정보요원의 활약상에 온 마음을 뺏긴 모양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자란 소년이 막강한 권력의 국가 정보기관을 동경하는 것은 예사롭겠지만 푸틴은 유별났다. 초등학교 9학년이 된 푸틴은 레닌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KGB 지부를 직접 찾아가 정보요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당시 KGB 직원은 이 당돌한 소년에게 대학 전공은 상관 없지만 법대를 나오는 게 유리하며, 특기가 될 정도로 스포츠를 잘하고, 평소 반국가적 언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키가 165㎝인 푸틴은 어릴 때부터 작은 체구 탓에 친구들의 놀림을 많이 받았다. 레슬링과 유도를 시작한 것도 단신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편이었다. 특히 유도에 소질을 보여 지역 청소년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기량을 갖게 됐다. 우리 식으로 공인 6단 수준의 유도 실력은 푸틴의 적극적인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학업에도 매진해 국립 페테르부르크대학 법과대학 입시에서 4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고, 이후 대학 생활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푸틴이 마침내 KGB 요원이 된 것은 대학 4학년 스물두 살 때였다. 그는 1998년 KGB에서 재편된 러시아 FSB(연방보안국) 국장 자리에 오른다. 어릴 적 꿈꾸던 정보기관의 수장이 된 것이다. 권력의 심장부에 들어선 지 불과 2년 만에 푸틴은 48세의 나이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권력자들의 정치적 행위를 개인의 성장사 또는 가족사를 통해 심리적으로 비춰보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역사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고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할 사안을 개인 문제로 돌리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의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개인사를 들먹이는 이유는 소비에트 체제가 해체되고 새 조국 러시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편입되는 격동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 때문이다. 정보요원으로서 말이다. 푸틴은 옛 소련이 붕괴되는 와중에 KGB의 위상 추락과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는 정보국장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권력을 바라보는 동기가 됐다.
걸핏하면 웃통을 벗어젖히고 근육질 몸매를 과시하는 푸틴의 마초 성향은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는 강박증을 촌스럽게 포장한 것이다. 지하철 차량공장 현장감독의 아들로 태어난 푸틴을 3선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게끔 추동한 게 이 강박의식이라는 분석도 있다. 차갑고 무표정한 푸틴에게 러시아 국민들이 줄곧 60~70%의 높은 지지를 보내는 배경에는 그의 강한 남자의 이미지가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 실제 푸틴은 취임 초기부터 초강경 정책들을 유지해왔다. 체첸반군이 모스크바 극장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일 때 푸틴은 자국민 100여 명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초강경 진압전을 펼쳤다. 이 사건은 정치적 기반이 허약했던 그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쉽게 씻어지지 않는 러시아 국민들의 트라우마도 푸틴에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옐친 대통령 재임 시 겪었던 사회적 혼란과 끼니마저 해결하기 어려웠던 경제난에 대한 정신적 상흔이다. 3선 대통령 푸틴의 꿈인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은 국민들이 갈구하는 여망이기도 한 것이다.
대개 권력자들이 보이는 공통점 두 가지가 있다. 남다른 애국심과 자기확신. 애국심은 그 이면에 편협한 민족주의가 자리하게 마련이고, 자기확신은 자칫 과대망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미 많은 꿈을 이룬 푸틴 역시 그 경계선에 발을 디디고 있는 듯하다. 지난 2000~2008년 두 차례 대통령을 지낸 푸틴은 이번 대선을 통해 6년 연임으로 2024년까지 차르(러시아 황제)를 능가하는 절대 권력자로 군림할 기반을 잡았다. 반푸틴 민주화운동도 본격적으로 불붙고 있다. 그럴수록 러시아 정국은 더 엄혹해질 가능성 많다. '강한 러시아'를 선택한 대가로 러시아 국민들이 두고두고 너무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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