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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말 외상 /배유안

말한 후엔 늘 후회…거짓 아닌데도 찜찜, 먼저 뱉고 행동하는 난 늘 말에 외상단골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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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1-08-19 20:31:14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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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라고들 한다. 소원도 함부로 빌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문득 이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말이 나의 기댈 기둥, 엄밀히 말하면 외상 카드가 되어 있었다.

청소년 소설 두 권을 쓴 덕분에 청소년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내 책을 읽은 독자들과의 만남은 책의 주제를 확장하고 공유, 소통하는 일이어서 작가로서는 기쁘고 뿌듯한 일이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어찌된 일인지 마음에 자꾸 괴로움이 쌓였다. 몇 가지 주제들을 버무려 책을 쓸 땐 나름 곰삭은 생각들을 내놓지만 독자들을 앞에 두고 뭔가를 말하는 일은 삶의 답을 가지고 있지 않는, 아직도 혼미함 속을 헤매고 사는 나로서는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진솔하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한다고 하면서도 청소년 앞이다 보니 어느 새 긍정적이고 유익해야 한다는, 다분히 선택적 이야기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돌아오는 길은 어쩔 수 없이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다. 전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진실은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뭘 그리 치열하게 글을 썼으며, 언제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살뜰히 계획하고 살았던가? 나는 얼마나 자주 부정적이며, 지적 독서에 소홀하며 저급한 취향에 시간을 내버리고 있는가? 또 얼마나 인간적인 관계를 외면하고 있으며, 일상에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가를 나 자신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특히, 청소년에게 감히 무슨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을까 싶어 남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말하기에 지겨움을 느꼈다. 자신감과 흥미도 줄었다. 말하는 순간, 나는 자의든 타의든 형성되고 있는 거짓의 반경 안에 들어 있었다. 선택적 말하기는 왜곡을 불러오고 소통 미흡은 항상 오해를 불러왔다. 그러다 보니 들은 것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상대방은 부분을 말했을 뿐이며, 나는 다르게 들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온갖 것들은 그 본질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나는 타인에게 또 얼마나 다르게 이해되고 있을 것인가? 

꽤 먼 곳에서 있었던 문학캠프에 다녀오는 길 역시 그랬다. 태풍 무이파가 몰아온 폭우를 뚫고 도착한 곳에는 며칠 전부터 캠프를 진행하고 있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과 만나서는 그날의 주제인 '함께 성장하는 우정'에 대해서, 덤으로 '타인이 아닌 자신이 기획하는 인생'에 대한 얘기를 했다. 돌아오면서 곧장 나는 가책과 괴로움이 스미어 들어옴을 느꼈다. 거짓이 아니라고 그게 다 진실성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또 확인했다. 우정을, 인생 기획을 말하기에는 내가 너무 빈궁했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 이야기는 부끄러웠다. 백 번 양보한다면 결국 나는 이번에도 내 진실이 아니라 내 지향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향, 그게 좀 위로가 됐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씨가 되게 하면 내 말에 대한 송구함이 덜어지지 않을까? 뱉어낸 말에 대한 책임은 그것밖에는 수습할 길이 없었다.

폭우가 할퀴고 간 지역을 지나며 적나라한 자연의 고발을 곳곳에서 보았다. 강변이 파이면서 한참 위쪽에 우뚝 서 있었던 한 모텔은 기반 공사가 부실했던지 밑동을 그대로 드러내며 집 전체가 기울어 있었다. 시멘트 길 위에 얄팍하게 덧입혀 있던 아스팔트가 시루떡처럼 통째로 뜯겨 나와 산 쪽으로 처박혀 있었다. 빈약한 속내를 강풍에 꼼짝없이 들킨 꼴이었다. 나도 자주 그랬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도 내 꼴은 어떻게든 드러나고 마는 걸 수시로 경험했다. 이제 감추고 싶은 것들이 감춰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속내를 제대로 갖추는 것 밖에는.

습작기에 어느 작가가 사인 하느라 팔목이 아파 죽겠다는 푸념을 들었다. 나도 사인 때문에 팔목 좀 아파 봤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했다. 강연 후에 내 손목을 안마해주던 소년에게 그 얘기를 해주며 말했다. "소원은 어느 날 문득 이루어져 있다. 오랫동안 그쪽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다." 내 말에 그 아이 얼굴이 빛났다. '오랫동안 그쪽을 향해!', 흡, 나는 또 내 말에 책임질 짓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게 거짓이 안 되니까. 말에 관한 한 나는 늘 외상 단골이다. 미리 갖다 쓰고 갚느라 허둥대며 살고 있는 것이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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