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찰스 폰지의 사기사건에서 따온 '폰지 사건'의 주인공이 버나드 메이도프라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마치 9·11테러사건으로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것처럼 이 사건은 세계 금융의 꿈인 월 스트리트 자체의 부실과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명한 펀드매니저인 메이도프의 이름은 바로 월 스트리트 자체이며 세계가 부러워하면서 우러러보던 미국의 증권시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I will be gone. 나는 사라질 것이다. 메이도프 사기사건에서도 범인들은 범죄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사라지는 'I.B.G 수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피해액은 500억 달러라는데 처음 투자가의 손실을 다음 타자가 막고 또 그 다음 피해자가 앞의 피해자의 손실을 막는다. 이렇게 자잘하게 나누어진 그 어느 적당한 시기에 관계자들은 무대에서 다른 무대로 사라지며 옮겨간다. 이 연출이 너무 정교해서 피해액이 500억 달러가 될 때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아주 어릴 적에 가끔 벌어지던 일인데 어머니 친구들이 집에 와서 "낙찰계가 터졌대"라면서 수다를 늘어놓던 기억이 있다. 계가 '펑크'나면 소위 계주인 '오야'는 밤 새 보따리를 싸서 도망을 간다. 그리고 나면 동네 이집 저집에서 피해가 돌출하고 남편 몰래 곗돈을 떼인 누구는 남편에게 쫓겨나고 가정이 풍비박산났다거니 하는 그런 소문들이 돌았다. 사건이 비교적 잘 마무리되는 경우는 계주가 적당한 돈으로 서로 손해를 나누어가지는 빚잔치를 벌이고 자잘한 불평 속에서도 동네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액수가 상당히 클 때는 신문의 사회면을 크게 장식하기도 했는데 1960년대나 70년대에는 비교적 흔한 얘기였다. 그래서 '계'란 원시적인 것이고 나쁜 것이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이젠 없어지고 사라졌겠지 했다. 은행권의 업무가 채 발전하지 못한 시기에 궁여지책으로 발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에 대한 선입견이 바뀐 적이 있었다.

1990년대에 뉴욕에 있을 때 뉴욕타임스에 "왜 한국인은 이민오자마자 가게의 주인이 되는가?"라는 기사를 읽고 난 다음이다. 말하자면 뉴욕 맨해튼의 델리는 대부분 한인의 소유인데 그 기사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처음 이민을 오면 다른 델리 주인들이 새로 온 사람에게 계의 일번을 주고 그 사람이 델리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가족 중심인 한국인들은 밤낮으로 일을 해서 맨 처음 탄 그 목돈을 갚는다는 것이다. 기사에는 옛날 개성상인들의 부기 실력까지 언급하면서 한국의 사금융 시스템이 한인 이민자들을 빠른 시간 내에 미국에 정착하게 한다는 것이었고 비교적 개인 간의 신용관계가 공고한 한국인들의 계모임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였다. 그리고 개인 간의 신용관계는 유난히도 친척끼리 가깝고 스킨십이 강한 민족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맞아! 깨진 계에 대한 기억만 있었구나. 계의 본질은 서로 협동하는 두레정신이었고 욕망보다는 절대적으로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부상조하는 것일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민자처럼 사회적 신용을 미처 쌓아 올리지 못한 사람에게 자립하기 위한 좋은 제도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도 터져나온 폰지 사기사건들의 면면을 보면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가야 하나 하는 자괴감을 느낀다. 귀족 낙찰계며, 다단계 판매 사기 등 고수익률을 미끼로 하는 수법들이 너무 많다. 이전에는 그냥 동네 아줌마들끼리 했던 사금융이고, 다단계 판매 사기도 고만고만했으나 이즈음은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이고 그 수법 또한 대담하다. 이런 데 엮이지 말고 조심하면 되겠지 하지만 메이도프사건에서 보듯이 공적인 채널을 통한 투자나 예금에도 위험은 마찬가지로 있다. 오죽하면 뉴욕 타임스의 프리드만이 "메이도프사건은 월 스트리트의 수법들보다 약간 더 불법적이었을 뿐"이라며 제도 금융 안에 존재하는 형식 등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겠는가.

오로지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욕망의 짐승으로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아마도 이젠 은행을 못 믿어 베개 밑에 돈을 넣어놓고 믿을 수 있는 상품끼리 물물교환을 해야 되는 그런 시대가 다시 도래할지도 모른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정뿐이다. 개인 간의 튼튼한 믿음뿐이다. 우리 자신의 삶으로부터 I.B.G . 즉 도망가지 않으려면….

우리들생명과학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