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치러가기 전 출정 훈시를 한다. 나는 감히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걸왕이 죄가 많아 하늘이 명하시니 그를 치려는 것이다. 바라건대 나를 도와 하늘의 법이 이루어지도록 하라. 나는 제군들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나는 식언(食言)을 하지 않는다(나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다).

식언의 고사로 흔히 인용되는 이 이야기는 '서경' 탕서에 나온다. 식언은 문자 그대로 토한 음식을 주어먹듯 내뱉은 말을 다시 삼킨다는 의미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지 쉽게 상상이 된다. 그러니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인 식언은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짓이라는 말이다.

식언의 고사를 말머리에 올린 것은 '수도권 규제 완화'와 관련해 정부의 태도가 연상돼서이다. 정부는 최근 경제가 어려워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도권 규제 완화 방침을 전격 발표했다. '선(先) 지방발전, 후(後)수도권 규제 완화' 약속을 식언한 것이다. 지방에서는 '이미 온 공장도 수도권으로 가게 생겼다. 지방은 고사(枯死)하라는 말이냐'는 울분이 낭자하다.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에게 한 약속들을 헌신짝처럼 버린 데 대한 허탈감과 절망감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졌다.

수도권 경쟁력을 유난히 강조해온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수도권 규제를 곧 풀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 지방발전'을 여러 번 약속한 터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분권이 효율적으로 되는 것이 국정이 잘되는 것이다."(당선인 시절인 1월 22일 전국 시·도지사협의회 간담회)

"지방경제 여건을 수도권보다 훨씬 좋게 만들겠다. 수도권보다 지방에 더 많은 투자 혜택을 주는 정책을 통해 지방경제 활성화를 꾀하겠다."(1월 14일 당선인 신년기자회견)

"수도권 규제를 무조건 풀 계획은 없다."(5월 충북도 업무보고)

"전 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을 원칙적으로 지켜 나가겠다"며 '선(先) 지방발전, 후(後)수도권 규제 완화' 방침 천명.(7월 21일 정책보고회)

국정의 동반자인 여당 박희태 대표의 "지방을 희생하며 수도권 규제를 푸는 것은 안 된다"(10월 2일 경남도청)는 말도 있다.

이런 말들은 탕왕 식으로 요약하면 "나는 지방경제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수도권 규제를 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식언을 하지 않는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이 이렇게 약속하는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방 사람들이 '선 지방발전, 후 수도권 규제 완화' 약속에 기대를 건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정부는 천금같이 여겨야 할 이런 약속들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식언 정부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약속을 외면하고 쫓기듯 발표하는 것은 그 정책의 정당성과 명분이 적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그 폐해가 클 것은 불문가지다. 수도권 규제는 공연한 '규제'가 아니라 '수도권 과밀, 지방 공동화(空洞化)'로 인한 공멸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역대 정부가 30여 년 동안 이 정책을 고수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굳이 설명을 보태자면 이런 정책에도 수도권 팽창과 지방의 피폐화는 지속됐다. 아무런 대책없이 수도권 규제를 풀면 이 같은 현상이 가속화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속된 말로 '지방은 굶어죽고 수도권은 배 터져 죽어' 종국에는 다 죽게 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국가 균형발전과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니 이 정부가 과연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국가를 합리적으로 경영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식민지다'란 책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준다. 지방은 '서울제국'의 '내부식민지'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지방경제 대책이 고작 '수도권 규제 완화로 생기는 개발이익금의 일부를 지원하는 방안'이니 빌어먹고 살라는 식민지 취급이나 뭐가 다른가. 적어도 지방경제 여건을 수도권보다 좋게 만들 생각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지방에 사는 사람은 이류국민'이라는 모욕적인 말이 나온 지도 제법 되었다. 한데 이대로 가다간 이류국민은 고사하고 '식민(植民)'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역민이 만들어준 정부와 여당이 공약을 식언하고 그러겠다는데, 지방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