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게임의 승부는 상대방의 패를 얼마나 읽어내느냐에 달렸다. 상대방의 패를 안다면 결과는 해보나마나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숨겨진 패가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특히 포커게임의 '히든카드'는 승부를 결정짓는 '비장의 수'라는 일반적인 용어로도 널리 쓰인다.

그런데 인디언 포커는 이런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다. 자신의 카드를 머리띠에 꽂아 상대방에게 보여주면서 정작 자신은 그 카드를 못본 채 승부를 겨룬다. 일반 포커가 상대방의 카드를 읽어내는 게임이라면 인디언 포커는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카드를 알아맞히는 것이 관건이다.

일반 포커판에서 어떤 사람이 인디언 포커식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패를 보여준 그가 매번 잃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설사 직접 보여주지 않더라도 자기만 믿고 덤비는 사람들의 패는 노련한 승부사에게 훤히 읽힌다. 승부세계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봉'이라 부른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외교 테이블에서 혼자 인디언 포커식으로 게임하는 사람이 떠올라서 하는 말이다. 세계 4강이라는 고수들 앞에서 외교 '봉' 노릇을 한다고나 할까. 새 정부 출범 이후 진행된 굵직한 외교전을 상기해보면 금방 수긍할 수밖에 없다.

우선, 미국과의 외교를 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한미관계를 복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말에는 지난 10년 동안 틀어진 한미관계를 바로잡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로잡겠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미국과 매우 친해지고 싶다는 강렬한 희망을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부시 대통령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는데도 친해지고 싶다니 아쉬울 게 없다. 우리의 카드를 이미 다 본 셈이니 결과는 뻔하다. 미국은 쇠고기 협상 등의 실리를 챙겼고, 우리는 '전략적 동맹 관계'라는 추상적인 지위만 얻었다. 이건 실용이 아니라 봉 노릇과 다름없다.

여럿이 게임을 할 때는 서로 견제를 해야 흥미있다. 판세를 살피지 않고 제멋대로 하면 승부에서 지고 핀잔까지 듣기 십상이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4강의 틈바구니에 낀 우리로서는 더욱 그렇다. 중국은 이미 미국의 호적수로 성장했다.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균형추 역할이 더 유리한 정세다. 그런데 정부는 한미동맹이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이다. 그 대가는 한중정상회담 때 곧바로 돌아왔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미동맹을 "냉전의 산물이며 동북아 평화에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상대국 정상이 방문한 시점에서 이 같은 발언은 외교 관례상 무례나 모욕에 가까운 것이긴 하다. 그러나 힘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외교의 기본을 망각한 우리가 자초한 측면도 크다. 냉전시대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 간의 '등거리 외교'를 펼쳐 실리를 챙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속셈을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과거보다 미래를 얘기하자"며 패를 다 보여줬다가 독도 문제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도 자업자득이다.

대북정책은 아예 북한과의 외교 노력을 포기한 듯하다. 북한은 최근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고 연변 냉각탑을 폭파함으로써 비핵화 약속을 지키는 한편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편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자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적성국교역법 적용 중단으로 화답했다. 미국과 북한의 화해 무드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 속에 완전히 왕따 신세다. 죽으나 사나 한미 공조를 외치는 정부는 북한과 미국이 협상해 결정하면 각종 비용만 대는 '봉' 노릇에 만족해야 할 판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이란 카드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는 우리나 미국이 바라는 최종 목표다. 미국은 십수년 동안 온갖 채찍과 당근을 사용했으나 실패하고 이제야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핵을 없애면'이란 절대조건을 내걸고 우리가 북한과 외교적 운신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북한의 요청이 없으면 식량지원은 없다"고 큰소리 치더니 이제는 "옥수수 5만t 받아달라"고 사정하다시피 하는 신세인 걸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실용외교'를 외치던 정부가 '미국'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혀 언제까지 인디언 포커식 외교로 '국제 봉' 노릇만 하고 있을는지 답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