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름다운 거리' 포스터

예전에 극단을 창단한다는 것은 크나큰 사회적 책무와 함께 창작집단으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그런 만큼의 숭고한 정신이 필요했다. 먼저 관공서에 단체를 등록해야 했고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대본 검열을 받아야 했다. 공연장 뒷편에는 어김없이 사복경찰들이 있었다.

가정은 뒷전이요, 작품마다 흥행은 참패이다 보니 단원과 객원의 구분 없이 출연사례금이 있을리 만무하였다. 공허하고 썰렁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소줏잔을 기울이다보면 여명이 밝아오는 게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그 사이 연극계도 놀라울 정도로 바뀌고 있다. 극단을 관공서에 등록할 필요도 없고 사복경찰들도 오지 않는다. 단지 관객들의 준엄한 평가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여간 여러 극단을 제법 옮겨 다니며 팔자소관처럼 떠돌던 사람이 극단 '황포돛대'를 창단했다. 창단공연(2004년 1월 7~17일, 가마골소극장)으로 '아름다운 거리'(이만희 작, 전승환 연출)를 선정하고 극단대표 홍성현은 필자를 찾아와 간곡히 출연 요청을 해왔다. 그때 필자는 중국에 다녀와야 하는 일과 다른 일도 있고 또 연습기간이 너무 짧아서 어렵겠다는 말을 했으나 최대한 연습시간을 배려한다기에 창단작품에 합류하였다. 워낙 짧은 기간이었고 금방 공연일자가 다가오자 배우들은 초조한 나머지 여관에서 합숙까지 해가며 연습을 했다. 이러한 강행군 덕에 열흘간의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뒤 3월께에 공연기획사의 초청으로 창원과 울산공연을 가게 됐는데 사건은 여기에서 터져버렸다. 창원공연을 마치고 나니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스태프들은 무대세트를 트럭에 싣고 다음날 공연을 위해 울산으로 향했다. 전승환 연출자와 배우들은 창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출발하여 오전에 창원 톨게이트를 지나려고 하는데 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경찰들이 불심검문을 하고 있었다. 승용차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조회해보더니 홍성현 대표를 검문소 사무실로 다짜고짜 데려가는 게 아닌가. 모두가 어리둥절했지만 잠시 조사받고 오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소식이 없어 승용차를 갓길에 대고 사무실로 가 보았다. 그런데 금방 풀려날 일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 사업을 했었는데 채무관계가 제대로 정리 되지 않아 기소중지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극단 대표이며 연기자였던 홍성현은 바로 그 자리에서 창원경찰서를 경유하여 부산으로 이송되어 버렸다.

연출자를 비롯한 나머지 연기자들은 황당했다. 울산공연을 못하게 된 건 물론이고 지금 한참 무대세트를 마지막 손질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는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일단 전화로 무대세트 작업을 중단시키고 울산에 도착해보니 극장 로비에는 관객들이 제법 많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기획사 대표를 만나 다음 기회에 공연을 하는 걸로 하고 어렵사리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런데 스태프들의 불평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제 저녁에 울산으로 왔었더라면 검문도 안 당했을 거고, 공연도 안한 무대세트를 철거해야 하는 수고를 안 해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 뒤 연극인들의 탄원서 덕분이었는지 그는 몇 개월 만에 다시 현장에 돌아왔고 지금은 연극은 잠시 뒤로 하고 생업에 몰두하고 있다. 필자는 홍 대표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비록 생업이 중요할지라도 책무를 갖고 탄생시킨 '황포돛대'를 쓸쓸한 나루터에 방치하지 말고 배를 띄워주길 바란다고. 그런데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창단공연으로 올려졌던 '아름다운 거리'를 당시 객원연출을 한 전 선생이 다시 전위무대(대표 전승환) 정기공연(24~27일,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으로 준비하고 있다. 물론 연기자들은 모두 바뀌었지만 다시는 이런 우여곡절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 다른 연극적 상상력을 기대해 본다. 연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