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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1> 소설 속의 자유인들

휴머니즘과 의협심…성인군자 같은 아나키스트의 세상 꿈꾸다

  •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  |   입력 : 2022-05-01 19:05:25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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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 나림(那林) 이병주(1921~1992) 선생의 타계 30주년을 맞아 국제신문은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하태영 교수의 ‘작품 속 시대정신과 법’을 5회 연재한 데 이어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을 지낸 조광수 전 영산대 교수의 ‘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이병주의 문학 작품을 새롭게 조명한다.

나림은 국제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단원들(왼쪽 사진)과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아나키스트’ 스틸컷. 의열단원은 실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여겨 자유롭게 생활하고 옷을 멋지게 입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특히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 ‘그 테러리스트를 …’의 동정람
- 독립투사 백정기와 닮은 꼴
- ‘관부연락선’ 주인공 유태림
- 해방정국 참교육자 모습 담아
- ‘그해 5월’ 등 나오는 성유정
- 좌우 초월한 언행일치의 삶

■아나키즘은 자유인의 사상

백정기(왼쪽), 이회영
아나키즘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사상이다. 이르게는 노자의 무위 정치나 장자의 소요유 그리고 디오게네스를 비롯한 키니코스학파의 주장과 처세가 있다.

한때 테러리즘의 시대에는 폭력과 파괴의 대명사였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생태주의나 협동조합의 모습으로 우리 가까이에 존재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과 가상화폐라는 물건도 아나키즘의 한 상징이다.

아나키즘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하든 큰 공통점이 하나 있다. 사람의 선함에 대한 깊은 신뢰다. 인간의 선성(善性)을 굳게 믿는 덕에 연대와 상호부조를 말할 수 있다.

그런 기초 위에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와 자율에 천착한다. 자유를 신봉하는 아나키스트, 자율 공동체를 지향하는 아나키스트. 그들을 영국의 아나키즘 작가 콜린 워드는 ‘행동하는 아나키(Anarchy in action)’라고 표현했고, 한국의 철학자·언론인·아나키스트 하기락(1912~1997)은 ‘자주인(Self-master)’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진정한 아나키스트들만의 대단함이 있다. 고매한 인격과 형형한 인품이다. 우리 시대엔 사라져버린 거인과 대인 그리고 도골선풍(道骨仙風)의 인물이 바로 아나키스트다. 이를테면 1920, 30년대 엄혹하던 일제 강점기에 휴머니즘과 의협심을 보여주었던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같은 독립운동가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 동정람, 경산

나림 이병주의 소설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에 아나키즘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이름도 특이한 동정람이란 노인이다. 출신과 성장 과정도 예사롭지 않다. 고아로 러시아 정교회 신부 슬하에서 자랐다. 소싯적에 독립투사들의 통역을 하며 레닌의 지우를 얻었을 정도로 맑고 밝았다. 그의 총명함은 러시아 문학을 비롯한 문학과 신화에 정통했다. 신화 공부의 연장으로 곰과 호랑이 등 동물학 분야에도 박학다식하다. 거기에 더해 피리를 기막히게 분다. 그가 한 곡 불기 시작하면 절로 모인 동네 사람들이 담을 삥 둘러싸고 모두 감상에 젖는다.

동정람이 ‘무언가를 하다 기약 없이 한 번씩 들르는 곳’이 나림이 사는 공덕동 달동네에 ‘학처럼 꼿꼿이 있는 경산 선생 집’이다. 경산은 ‘부드럽고 가식 없는 태도로 빈곤과 병고를 견뎌내는 독립지사’다. 아내를 모욕하고 자결하게 하는 등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상대도 기어이 기꺼이 용서하는 도인이다.

그는 친구 동정람을 “젊어서부터 의협심으로 누구보다 먼저 일 처리를 한 다음 밤 세워 신화와 박물지를 독파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이 대목은 ‘육삼정 의거’(일제 강점기인 1933년 3월 17일 중국 주재 일본 공사를 살해하려 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의 주역인 백정기 의사를 그리며 이강훈이 했던 회고와 아주 닮았다. “백정기는 청렴결백 의리 신뢰 의용 강직 등 모든 미덕을 갖춘 자유 혁명가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사지로 나아갈 때는 항상 앞장서기를 원했으며, 동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씨는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해도 지나친 평이 아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성인에 가까운 점도 없지 않았다.”

가히 자유연대와 직접 행동의 한 상징이다. 자유연대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직접 행동은 희생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 한편으론 냉정한 테러리즘 선봉의 모습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더 없는 성자의 모습을 겸전한 참으로 탁발한 인물이다.

테러를 감행하는 아나키스트와 고매한 인격. 연결이 잘 안 되지만 그 모순된 모습이 꼭 모순되지는 않는다. 러시아 아나키스트인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용어로 하자면 ‘고귀한 동기(Noble motives)를 가진 테러’다. 최소한의 희생과 상처로 거대한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폭력의 미학과 살신성인의 비장함이 있다. 그 어려운 이야기를 나림은 동정람과 경산의 사연으로 풀어간 셈이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나림은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 병들고 외로운 독립지사를 가까이 모셨다는 사실이다. 도움도 드리고, 그분들의 기억을 채보해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소설의 시대 배경인 1960년대엔 나라를 있게 한 독립지사를 국가조차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아니 대우는커녕 혁신계로 분류된 인사는 예전에 없던 박해까지 받았다. 심지어 5·16 직후엔 평생 애국애족하던 최근우 같은 노 지사까지 옥사하는 일이 있었다. 일제도 감히 어쩌지 못했던 골기의 인사를 차가운 서대문 감옥에서 죽게 만들다니, 비참의 극이란 표현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그저 어이없다고 할 수밖에. 그 상황을 나림은 ‘그해 5월’에서 언급한다.

나림 자신도 공덕동 달동네에서 전세를 살고 있다고 설정할 정도로 곤궁했을 때다. 필화 사건으로 2년 7개월의 영어(囹圄) 생활을 마치고 전전긍긍하던 시절이다. 그런데도 나림은 때가 아닐 때 베풀 줄 아는 대인이고 자유인이었다.

■‘관부연락선’ 유태림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는 아나키스트 노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나림의 작품엔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 언급이 많다. 딱히 아나키즘이라고까진 밝히지 않아도 낭만적 휴머니즘이나 허무주의의 모습으로 묘사된 경우도 많다. “허무주의가 끼어들면 어떤 사상도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거나, 니힐리즘과 테러리즘 그리고 데카당스 등 다양한 변주로 아나키즘 언저리를 맴돈다. 나림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세계의 평화나 호혜주의, 사해동포주의는 아나키즘의 또 다른 표현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관부연락선’의 유태림과 ‘그해 5월’ 등의 성유정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이며 휴머니스트다. 그리고 딜레당트다. 유태림은 “나는 망명인으로서의 내 숙명을 감상(感傷)하고 있었다. 코스모폴리탄이란 견식을 모방하고, 에뜨랑제를 뽐내는 천박한 기분으로…”라고 자책하지만, 결코 서투른 인물이 아니다. 해방정국 모교 교단에 서서 좌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학생들을 곱게 졸업시키는 데만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그 결과 “학급 33명을 모두 무사히 졸업시키고, 그중 29명은 일류의 인물로 활약하고” 있다.

‘관부연락선’의 에필로그는 “중년이 된 그 학생들이 지금도 유태림의 말들을 회상하곤 정신의 영양으로 삼는다”고 마무리한다.

■‘그해 5월’ 등 성유정

성유정은 여러 작품에서 인사와 세사에 통달하고 초연한 어른의 역할을 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누구나 모순투성이이며, 사람을 흑백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역사는 좌나 우로 흔들려서는 안 되고 가운데를 쥐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과 태도로 보여준다.

■‘미완의 극’ 테러리스트 조직

‘미완의 극’에는 휴머니즘을 철학으로 하는 테러리스트 조직이 나온다. 모험심과 정의감으로 뭉친 세계 각국의 청년 조직을 “0차원의 집합”이라고 표현한다. 나림다운 함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용어다. “0차원이란 수학적으로 점(點)이다. 점의 연속은 선(線)인데, 선은 침투력은 있지만 폭발력이 없다. 그런데 집합체로 된 0차원은 폭발력이 있다”는 해설도 인상적이다. 세계 국가를 꿈꾸는 유한일의 소울메이트인 램스도프가 한 이 말도 이병주식 아나키즘의 한 변주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니힐리즘을 이해했을 때 그때 세계 국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 조광수 전 교수 약력

전 한국아나키즘학회장, 국립대만대학 정치학 박사, 저서 ‘중국의 아나키즘’ ‘중국이란 코끼리 다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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