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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의 무비 셰프 <28> 공리

금세기 중화권 최고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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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공리.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오랜 시간 공리의 영화를 지켜봐 왔던 것 같다. 공리는 중국영화의 역사이고 살아있는 전설이라 할만하다. 연대기적인 인물이다. 연보라도 들여다보면서 배우 공리의 행적을 살펴볼 정도로 그녀의 위상은 높다. 중국계 배우들의 출생지를 보면 다수가 운남성 광동성 산동성 등등으로 표기되어있다. 중국에 대한 상식이 한참 모자란 필자로서는 중국에 城이 너무 많고 그 규모도 엄청 크기에 자신이 태어난 출생지를 城으로 표기한다고 생각했다(여기에 대해 동료에게 물었는데 그들은 공교롭게도 성의 의미를 다 알고 있었다.)

한자로는 ‘성을 쌓다’의 城이 아니고 ‘살필 省(성)’이다. 이 省 하나가 미국 땅의 단위 ‘州(주)’처럼 우리나라 전체보다도 면적이나 인구 수에서 훨씬 규모가 큰 곳이 대부분이다. 광동성(廣東省)은 중국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이라 한다. 그 수가 2021년 기준 무려 1억 2601만 명이나 된다. 비슷한 예로 인도 뭄바이가 있는 마하라슈트라 주의 인구는 1억 3000만 명이나 된다. 이들 대륙의 크기가 얼마나 광활한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상상하는 즐거움도 있다.



공리는 1965년생, 요녕성(랴오닝성) 선양 지방에서 경제학 교수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의 꿈은 가수였다. 1985년 음악학교 입시에 실패한 뒤 중국 최고 연극 영화 관련 대학인 북경의 중앙희극학원에 입학, 장예모 감독에게 발탁돼 ‘붉은 수수밭’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의 두각을 나타내었다. 공리의 후기작으로 볼 수 있는 ‘5일의 마중’에서 부부로 나온 배우 진도명의 후배다. 공리는 현재까지도 뛰어난 재능과 미모로 중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세계적인 스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붉은 수수밭’은 칸 영화제 등 유명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유명세를 얻었다. 1990년대 중국 영화 황금기와 함께 배우 공리도 주목받았다. 1992년 ‘귀주이야기’로 제49회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여우주연상을 받기에 이른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국제 영화제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할 정도로 인지도가 치솟는다.



장예모(1950년생)는 공리와 워낙 인연이 깊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중국 영화감독이기에 좀 더 살펴본다. 공리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발탁한 장예모 감독과 오랫동안 동거하며 연인으로 지냈다. 장예모와 헤어진 뒤로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2006년 영화 ‘황후화’와 2014년 ‘5일의 마중’에서도 감독과 배우로 만나 작업했으니 사람 인연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다. 인연에 따라 운명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 장예모는 대표작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등에서 긴장과 흥분을 팽팽하게 잡아채는 붉은 색채와 광선으로 스크린을 달군다.



장예모는 중국 5세대 감독으로 불린다. 수상 경력을 따져보면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은 중국 본토 출신 영화감독이다. 세계 3대 영화제(베를린, 베니스, 칸)에서 모두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등, 아시아 감독으로는 최고 커리어를 가졌으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빡빡 깎은 헤어스타일이 거장의 품격과 잘 어울린다.



영화 ‘황후화’ 속 배우 공리.


5세대 감독의 어떤 영화적 특징이 이같은 선풍을 불러온 것일까. ‘중국의 아방가르두‘ ’중국 영화의 뉴 웨이브’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80년대 중반 이후 불현듯 세계 영화계 기린아로 떠올랐다. 76년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문화혁명이 불길이 사그러들고 예술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66년 문을 닫았던 베이징 영화아카데미가 78년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영화 아카데미가 부활했을 때 교수직으로 돌아온 이들이 4세대 그룹을 형성하며, 이들 밑에서 영화 수업을 한 작가들이 5세대이다. 5세대 감독들은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와 매끄러운 영상 전개를 거부한다. 이들의 영상은 실험적 색채와 구도, 의도적인 불균형이 빚어낸 역동성으로 꿈틀거린다.



공리를 처음 본 것이 어떤 영화였을까.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연도를 따져보면 ‘붉은 수수밭’(1988년)에서 공리를 처음 본 것이 확실하다. 이어 ‘귀주이야기’였다. 이 네 편의 영화만 봤으니까 당시에는 공리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 굳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매력적이고 연기도 잘하지만 다소 강인한 시골 농투성이 역할을 맡아서인지 약간은 촌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영화의 배역 때문에 장만옥같이 우아하고 부드럽고 귀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공리의 연기 폭은 매우 넓고도 다양하고, 맡은 바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매춘부 같은 하류층 역부터 시골 여인이나 주부 같은 평범한 서민층, 귀부인 역, 왕비 같은 상류층 역까지 온갖 역할을 훌륭히 연기한다. 이와같이 여러 역할을 연기했지만 공리에게 배우로서 예술적 명성을 안겨준 배역은 질곡의 중국 근대사를 살아가는 여인들이었다. ‘붉은 수수밭’ ‘패왕별희’ ‘인생’ ‘홍등’ ‘국두’ ‘귀주 이야기’ 등 역사의 격동 속에서 무력하게 휩쓸리는 여성 역할은 공리의 전매특허다.



공리는 배우라는 직업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공자가 아니고 공리 왈(曰),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너무 많은 일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어떤 배우들은 연기하고 나서 프로모션 활동을 한다거나 연출을 한다거나 다른 쪽 일을 준비하는데, 나는 배우로 시작해 그거 하나만 잘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 한가지만 유지하고 몰입하고 있고. 배우로서 살아오면서 모든 작품을 내 생각에 따라서 선택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싫어하거나 남들이 시키는 건 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 선택은 내가 좋아서 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가 좋다고 느끼는 캐릭터들을 연기할 것 같다. 위험부담은 있겠지만 내가 좋다면 언제든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하겠다.”



영화 ‘붉은 수수밭’ 속 배우 공리. 가운데.
‘붉은 수수밭’(紅高粱; Red Sorghum)은 고량주 증류업에 종사하는 젊은 여성을 다룬 1987년 중국 영화다. 모옌의 소설 ‘홍까오량 가족’이 원작이다. 앞서 얼핏 언급했지만 감독 장이머우와 공리의 데뷔작이다. 두 사람은 이 영화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영화는 서사보다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강렬한 영화다.

후반부에 공리(나의 할머니, 추얼 역)가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진다. 망연자실한 남자주인공 강문(조부 위잔아오 역)과 아들, 두 사람이 ‘붉은 동상’이 되어 한참 서 있었을 때, 군가와 같이 굉장히 씩씩하지만 씩씩해서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합창(배경응악) 이 들려오는 그 장면이 오랫동안 잔상에 남는다. 그리고 오리지널 고량주의 색깔이 저렇게 붉었나 생각했다. 우리가 마셨던 ‘빼갈’, 연태고량주나 이과두주도 소주처럼 투명이었다.



‘붉은 수수밭’은 현란한 색감을 통한 환상적인 영상미와 독보적인 미장센으로 주목받았다. ‘붉은 수수밭’에서 장이머우는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을 선명하게 분출시키는 강렬한 ‘레드’를 전편에 배치하여 놀랍도록 아름답고 환각적인 영상미를 선보였다. 여기에 중국 전통음악과 노래를 매치해 동양적인 이미지에 대한 서방세계의 호기심도 한층 고조시켰다.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莫言)의 소설을 강렬한 영상으로 빚어낸 ‘붉은 수수밭’은 중국 예술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모옌을 잠시 들여다본다. 중국 산동성 가오미 현 태생. 본명은 관모예 로 모옌(莫言)은 필명이다. 필명의 뜻은 ‘말을 하지 않는다’이다.



중국에서의 그의 위상은 노벨 문학상 하나로 함축할 수 있다.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민담과 역사 그리고 당대 현실을 모두 융합한 문장이 일품이며, 프란츠 카프카 혹은 윌리엄 포크너에 비견된다. 현실재현적 이야기에 다양한 중국민담을 삽입해 엉뚱한 이야기 구조로 몰아간다. 당대 중국작가 중 모옌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평에 힘이 실릴 정도다. 옌롄커나 쑤퉁, 위화 등 유명작가도 모옌보다 한 수 아래라는 의견이 있다.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작품 수준에 큰 슬럼프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모옌의 문학 역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작품 중 체제 옹호나 프로파간다를 깔고 있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노벨문학상이 중국에서 나온다면 모옌 아니면 위화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수상이 유력했다. 모옌이 친정부적 작가라고 주장되기도 하는데, 문단의 공식적인 직함을 가졌다고 해서 어용 작가라고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홍등’은 1991년 제작된 드라마 영화다. 장예모가 감독했다. 1991 베네치아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 1992 영국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이다. 이 영화는 1920년대 중국이 배경이다. 함축하면 첩들 간의 갈등에서 파생되는 잔혹한 기록물이다.



앞서 언급한 ‘붉은 수수밭’도 붉은색, ‘홍등’ 역시 붉은 이미지가 난무한다. 중국 하면 왜 붉은 색일까. 중국인에게 붉은색은 상서로움과 길함을 뜻하는 색으로 역사 전체에 물들어 있다. 중국 국기인 ‘우싱홍치(五星紅旗)’의 바탕은 단호한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그들의 언어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현금을 선물할 때 반드시 붉은색 봉투인 홍바오(紅包)에 담아야 한다. 부차적인 의미로 질투나 위기 등의 의미로도 쓰이는데 영화 ‘홍등’은 이에 속한다. 피와 결부되어 폭력과 잔인을 상징한다. 반면 생명, 정열, 사랑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이 때문에 동물적 본능을 일깨우는 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성별 중 여자를 뜻하기도 한다. 영화 ‘홍등’에서도 이러한 요소가 자주 등장한다.



첫 장면, 자존감이 강해 보이고 깊은 눈매를 한 여자가 보인다. 송연(공리 분)이다. 다부지고 단단해 보이는 입과 턱에서는 지성과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첩으로 시집을 가겠습니다. 그것이 여자의 운명이지요.” 넋이 나간 듯 말하는 여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이 불안하고 암담한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 ‘홍등’은 시작한다.

네 번째 첩으로 ‘진’의 대저택에 들어간 송연의 캐릭터는 표독스럽게 다른 첩들을 위협하는 간사한 인물은 아니며, 울고 상처받으며 착실하게 피해자 역할을 수행해내는 인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점에서 배우 공리의 섬세한 연기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송연은 매우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인물이다. 매서운 추위에 자신의 몸종을 처소 밖에 세어놓아 동사하게 만들고, 만취한 상태로 셋째 첩의 불륜을 폭로해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송연을 ‘나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장예모의 화면은 살아남기 위한 여자들의 이런 처절한 거짓말과 부정을 그저 담담하게 담아낼 뿐이다. ‘홍등’이 가진 비극성은, 홍등이 주는 독특한 시각적 아름다움과 정제된 화면을 통해 더 강조되고 부각된다.



영화 ‘귀주이야기’ 포스터 속 젊은 시절의 배우 공리.


‘귀주 이야기’는 역시 장예모 감독이 연출하고 공리가 주연한 1992년작 중국 영화다. 천위안빈(陳源斌)의 중편소설 ‘만가소송(萬家訴訟)’이 원작이다. 1992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여우주연상(공리)을 받았다. 간략히 줄거리를 본다.

중국 어딘지 몰라도 우리 식으로 말하면 깡촌 중 깡촌에 사는 귀주(추쥐, 공리 분)는부푼 배를 움켜쥐고 일하며 출산을 기다린다. 그런 어느 날 남편 칭라이(류페이치)가 촌장 왕씨와 대를 잇는 문제와 남녀차별에 관한 모욕적인 언쟁을 하다 왕씨한테서 국부에 치명적 일격을 당한다. 왕씨 잘못이라고 생각한 추쥐는 경찰에 고소해 치안관의 중재를 받는다.



왕씨에게서 치료비를 보상받는 과정에서 왕씨가 돈을 던져버린다. 모욕감을 느낀 그녀는 왕씨와 화해하지 못하고 왕씨를 법원에 고소한다. 추쥐의 권리에 대한 끈질긴 결심은 남편과의 불화 속에도 계속돼 항소하고 항소해 결국 승소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비정상적인 출산 때문에 위기에 빠졌다가 왕씨의 도움으로 시내 병원까지 가서 아이를 출산하고 그와 화해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남편에게서 후유증이 발견되고 급기야 치안관은 왕씨를 체포하고 만다.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공리의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이 영화는 거의 다큐로 느껴질 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다. 때꼬장물 좔좔 흐르는 그들의 의상과 시골집안 소도구, 칼국수 같은 음식을 시골스럽게 먹는 장면 등등 디테일이 장난 아니다. 리얼리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공리의 임신 연기는 가히 역대급이다. 부푼 배를 내밀고 걷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완벽하다.

특히 ‘귀주 이야기’를 포함해 그녀의 초창기 영화들에서 약간 불규칙한 치아를 활짝 드러내고 웃는 공리의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추신:

공리가 2008년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한다. 중국이 발칵 뒤집힌다. 그는 단순히 유명 배우가 아니라 중국 최고 국정자문기구이며 각계각층 대표로 구성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까지 지냈다. 중국 정부가 최고 배우로 인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예우한다. 그런 인물의 귀화는 큰 사건이었다. 귀화 이유는 잘 모르지만, 중국에서는 배신자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하지만 공리처럼 대단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조차 외국 국적을 취득할 정도로 중국에 문제가 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다. 아무튼 중국으로서는 국가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다.ij07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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