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이라는 말은 ‘가치중립적’이며 ‘논리적’이고 ‘정직한’ 것처럼 느껴진다. 과학적이라는 말 자체가 진실에 가깝다는 말처럼도 들린다. 하지만 이 책에선 정치와 과학의 관계, 과학과 이데올로기 간의 공모를 보여주면서 그 이면을 파헤친다.

리센코는 20세기 중반 소련 생물학계를 망하게 한 원흉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획득 형질의 유전을 믿었는데 이는 한 유기체가 일생 동안 획득한 특성이 그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가설이다. 이 원리를 농작물과 가축의 재배와 사육에 적용하려고 했고 그는 실제로 러시아 생물학계를 석권했다고 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다 1965년 러시아 유전학자들은 그가 소련 농업에 지대한 피해를 초래한 사기꾼이며 소련 최고의 유전학자 다수의 옥고와 사망에 책임이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리센코주의는 전세계에서 유사과학의 동의어로 간주되면서 그는 몰락했다.

그런데 최근 후성유전학이 등장하면서 리센코의 유산을 새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정보가 유전자의 DNA 염기서열 내부에 독점적으로 보전되며, 유기체가 일생동안 경험한 사건들은 이 염기서열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으므로 유전과 무관하다는 원칙에 의문을 제기했다. 분자 수준에서 DNA에 가해지는 어떠한 변형이 염기서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유전자 스위치를 켜거나 끄게 해 유전자 활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후성유전학을 통해 발견됐다.

네덜란드에서 1944~45년에 있었던 겨울 기근동안 약 2만2000명이 굶어죽었다. 그때 임신 중이었던 여성의 손자손녀들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비율로 장애를 겪었다. 손자손녀 세대의 어머니들은 임신기간 정상적으로 음식을 섭취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할머니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놀랍게도 초세대적 후성유전적 유전이 일어난 셈이다.

이에 따라 리센코를 재평가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문제는 러시아 내에서 이를 이용한 정치적인 방향성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리센코를 복권시킴으로써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스탈린 체제도 옳았다는 논리로 발전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반대로 러시아 주류 유전학계에서는 리센코의 부활을 두려워해 후성유전학 연구 자체를 기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학이 과학으로서 제대로 서지 않고 정치와 이데올로기 강화의 도구로 이용되면 누구도 과학을 믿을 수 없다. 저자는 리센코를 통해 이를 경고하고 있다.

최영지 기자 jador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