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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기자의 영화 人 a view]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배우 고아성

“낯선 90년대 고졸 여사원 연기 … 일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담고 싶었죠”

  • 이원기자 latehope@kookje.co.kr
  •  |   입력 : 2020-10-27 19:20:22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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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사 8년 차 말단 여직원 삼총사
- 공장 폐수 무단 방류 목격하고
- 함께 회사 비리 파헤치는 이야기

- 정의롭고 주체적인 자영 역 맡아
- 능력 있어도 무시당한 부조리 속
- 당당히 제 갈 길 가는 여성 그려
- 이솜·박혜수와 환상적인 케미도

- “대기업 다녔던 이모 얼굴 떠올라
- 잘 보여줘야겠다는 책임감 커져
- 제 가치관 캐릭터에 잘 담겼으면”

아역부터 시작해 20대로 접어든, 데뷔 16년 차 배우 고아성은 단단한 내공이 느껴지는 연기자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괴물’ ‘설국열차’ ‘우아한 거짓말’ ‘오피스’ ‘오빠 생각’ ‘항거: 유관순 이야기’,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라이프 온 마스’ 등에서 알 수 있듯 장르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존재감이 확실한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지난해 개봉한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는 죽음과 열사로 기억되는 유관순을 삶과 인간으로 그려내며 깊은 감동을 줬다.

1990년대 상고 출신 대기업 8년 차 여사원 역을 연기한 고아성. 그는 ‘괴물’ ‘설국열차’ ‘오피스’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 이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으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21일 개봉한 독특한 제목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는 상고 출신 8년 차 대기업 사원 역을 맡아 다시 한번 공감가는 연기를 펼쳤다. 대졸 사원보다 업무 능력이 뛰어나지만 실상은 상사 입맛에 맞는 커피를 타야 하는 1995년 생산관리 3부 사원 이자영이 된 것이다. 자영은 토익 성적 600점을 넘으면 대리로 승진해 진짜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회사 영어토익반에서 수업을 듣는다. 하지만 어느 날 회사 공장에서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것을 목격하고 같은 상고 출신 여사원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과 함께 회사의 비리를 파헤친다.

“시나리오만 보고 영화를 하게 됐다. 아주 재미있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시나리오보다 이야기와 메시지가 더 풍성해져서 좋았다”며 만족해하는 고아성을 만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그의 연기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1995년 고졸 여사원을 연기하다

업무 능력은 베테랑이지만 늘 말단인 세 친구가 힘을 합쳐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1992년생인 고아성에게 1995년은 낯선 시대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전혀 경험하지 못한 회사원으로 분해야 하는 그에게 이자영이라는 인물은 도전이었다. “1995년에 대한 기억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시대의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 테스트를 하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불현듯 스치는 단상이 있었다. 그 모습은 당시 퇴근하고 집에 왔던 이모의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 봤던 일하는 여성의 단상이 이모를 통해 뇌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뭉클했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이모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실제 이모가 영화 속 자영과 비슷하게 1995년에 대기업을 다녔다. 이모가 회사 뒤에서 여사원들이 모여 찍은 단체 사진을 보여줬는데 비단 이모뿐만이 아닐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잘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영화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직원들의 커피를 타거나 남자 사원들의 뒤치다꺼리만 하고, 대졸 여사원보다 능력이 있음에도 무시당했던 그 당시 고졸 여사원의 경험과 부조리한 상황들이 그려진다. 자영은 12초 만에 상사들 취향에 맞게 커피를 타고, 자신이 쓴 보고서를 남자 사원이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보고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가루 커피와 프리마가 사라지고 믹스 커피가 급증한 이유가 IMF 때문이라고 하더라. 정리해고를 하면서 커피 타주는 여직원이 해고돼서 믹스커피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무척 아팠다.” 하지만 자영은 그 안에서도 당당하게 제 갈 길을 가려고 노력한다. “자영은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희망을 갖고 일과 직장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실제 사건 모티브로 한 폐수 사건

업무 능력은 베테랑이지만 늘 말단인 세 친구가 힘을 합쳐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0년대 고졸 여사원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고발하는 영화는 아니다. 제목에서는 표현되지 않지만 회사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상고 출신 여사원 3인방이 회사가 덮으려는 무단 폐수 방류를 파헤친다는 것이 중심축이다. 강이나 하천에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사건은 과거에 꽤 있었는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1년 낙동강 페놀 폐수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밝고 명랑하다. 그렇다고 폐수 방류 사건을 가볍게 다룰 수는 없었다. 공장 부근 마을 사람들이 아픈 모습을 보고 자영은 이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폐수로 기른 과수원 사과를 베어 먹는 장면에서 그 모습이 잘 담겼다.” 어쩌면 자영의 이런 모습 때문에 고아성이 캐스팅이 됐을지도 모른다. ‘헝거: 유관순 이야기’ 때도 그렇지만 고아성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때 용감하고 정의롭다는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이런 역할을 할 만큼 정의로운 사람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종필 감독님에게 이런 생각을 말했더니 자신도 이런 이야기의 영화를 찍어도 되는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그러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될 수 없지만 조금씩 바뀐다고 하더라.” 이후 고아성은 조금이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여배우 3인방의 연기 앙상블

앞서 고아성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시나리오보다 풍성한 영화가 됐다고 했는데, 그 이유로 자신을 포함한 여배우들의 호흡을 들었다. 추리소설 마니아인 마케팅부 사원 정유나를 연기한 이솜과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의 회계부 사원 심보람 역의 박혜수와의 연기 앙상블이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자시사 이후 세 배우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기도 했다. “회사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셋이 힘을 합쳐야 해서 합이 중요했다. 배우들의 합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닌데, 처음 셋이 만나서 30분 만에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 배우는 각자 스타일도 다르고 연기하는 방식도 각각인데, 한 가지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열린 자세로 상대를 대했기 때문에 금세 친할 수 있었다. “이솜 언니는 대장이었다. 나이로 보나 키로 보나 제일 대장이어서 잘 이끌어줬다. 혜수는 막내인데도 뭔가 든든함을 주는 내면이 단단한 친구였다. 연기도 잘 하고 자기중심을 잘 잡았다.”

지방 촬영 때면 숙소의 방을 따로 잡지 않고 한 방에서 마치 합숙하듯 지냈다. “딱히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다. 촬영이 끝나면 각자 방으로 흩어졌는데, 외로워서 그런지 어느새 제 방에 다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라. 제작진도 처음에는 각자 방을 배정해 주다가 나중에는 하나만 주더라.” 배우들끼리 한 방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만큼 마음이 잘 맞았고 세 배우의 마음이 온전히 스크린에 투영됐다.

돌이켜보면 고아성은 주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최근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이 도드라지고 여성 영화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성 영화가 주류인 한국 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많은 분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배우는 좋은 연기로 좋은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도 그런 마음에서 잘 만들고 싶었다.” 더불어 고아성이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는 그 시대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은 작품들이 많았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제 가치관에 맞는 영화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제 가치관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아도 캐릭터에 그런 모습이 우러났으면 한다. 특히 ‘라이프 온 마스’부터는 일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고아성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이제 천직이 됐다. 이전까지는 배우가 자신에게 맞는 옷인가 싶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배우라는 직업에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일인데 못하면 속상하고, 앞으로도 이 공간 안에서 살 것 같다”는 자신의 말처럼 30대에도 40대에도 좋은 작품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하는 배우로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

이원기자 latehop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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