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만영화 4편, 드라마도 흥행
- 안주하는 삶에 반성하는 찰나
- 어릴 때부터 꿈 꾼 연출에 용기
- 하고싶은 이야기하자는 생각에
- 직접 쓴 시나리오로 감독 도전
- 4년 준비한 영화 ‘사라진 시간’
- 시골 화재 파헤치는 형사 내용
- 절친한 배우 조진웅이 주인공
- “좋은 말만 듣고자 하는건 바보
- 24일 개봉, 관객 쓴소리도 OK”
연기 인생 33년간 연극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구축해온 배우 정진영이 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사라진 시간’에서는 직접 메가폰을 쥐고 카메라 뒤에 섰다. 그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4편의 영화 ‘왕의 남자’ ‘7번방의 선물’ ‘국제시장’ ‘택시운전사’를 비롯해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바람의 나라’ ‘동이’ ‘사랑비’ ‘화려한 유혹’ ‘보좌관-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 등에 출연하며 지적이면서도 정감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그런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연출에 용기를 냈으며, 직접 쓴 시나리오로 촬영장에서 “레디 액션”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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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시간 꿈꿔왔던 영화 연출에 도전한 33년 차 배우이자 신인감독 정진영. 영화 ‘사라진 시간’ 촬영장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하는 것은 머릿속에 있었지만 개봉의 순간은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다. 개봉을 앞두니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패닉 상태다”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배우로서 많은 영화의 개봉을 경험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처음이기에 그 떨림이 격앙된 목소리에서도 묻어났다. 이제는 관객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정 감독에게 메가폰을 쥐게 된 이유와 첫 연출작 ‘사라진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안주하는 배우 아닌 예술가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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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라진 시간’ 스틸컷. 배우 조진웅이 의문의 화재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로 나서 극을 이끌어간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
연기를 하다가 연출을 하게 된 배우들은 꽤 많다. 김윤석 하정우 문소리 유지태 등이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한 배우들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감독의 어려움을 잘 알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출을 꿈꾸는 이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로 관객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정 감독은 어떤 마음으로 연출의 길에 들어서게 됐을까? “2016년 드라마 ‘화려한 유혹’이 괜찮은 시청률과 평을 받으며 막을 내렸다. 한 작품을 마치고 나면 자신을 돌이키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때 ‘나는 뭐지? 나 뭐하고 싶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로서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배우로서 시스템 안의 안전한 자리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20대에 생각한 예술가는 힘들고 외롭더라도 도전하는 것인데 지금은 너무 안주하고 있다고 느꼈다.”
당시만 해도 그는 감독으로 데뷔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예술가로서 막연한 도전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출연하기로 했던 독립영화가 촬영 1주일을 앞두고 투자를 받지 못해 무산되는 일이 생겼다. “허무하고 화도 났는데, 두 달 정도 시간이 비게 됐다. ‘이 참에 내가 시나리오 써보자’ 하고 글을 썼는데 굉장히 관습적인 시나리오를 썼더라.” 자신의 감성이나 지향점이 주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정 감독은 ‘내가 왜 이러지?’라는 자책과 함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로 했고, 그래서 완성된 시나리오가 ‘사라진 시간’이다.
■너무도 낯선, 하지만 자유로운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훌륭한 감독도 많은데 이왕 하려면 내 느낌대로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존 영화 어법에 따라가지 말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쓰려고 했고, 이렇게 낯선 이야기와 형식을 갖게 됐다.” 정 감독의 말처럼 ‘사라진 시간’은 묘한 영화다. 영화는 시골 마을에 살던 젊은 부부가 화재로 죽게 되고, 형사 형구가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형구는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다. 이야기는 미스터리 추리극 같지만 특정 장르로 단정 짓기엔 너무 복합적이다. 또한 이야기의 흐름은 의식의 흐름을 반영한 듯 자유롭게 흘러간다.
“어릴 때부터 ‘나는 뭐지?’라는 질문을 하고 살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남들이 날 이렇게 생각하지’에 맞춰서 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규정하는 나는 다를 텐데 말이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뭐지?’라는 생각을 자유롭게 펼쳤다.”
영화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상황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지 않는 소위 ‘불친절한 영화’다. 이것은 정 감독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으로 관객이 이해하기보다 이야기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야기의 파도가 다가오는데 이전 파도를 이해하기 위해 멈추면 새 파도를 타지 못하게 된다. 대신 설명될 수 있는 어떤 장면이나 소품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본 후 복기하면 수미쌍관의 묘미를 느낄 수 있으며, 단서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이런 형식의 영화들이 그렇듯 엔딩도 열린 결말이어서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이 또한 “갑자기 시작해서 갑자기 끝나게 하려 했다”는 정 감독의 의도와 일치한다.
■‘사라진 시간’의 지원군
충무로에서 상업영화로 제작되기 힘든 영화 ‘사라진 시간’에 가장 큰 힘이 된 이가 바로 조진웅이다. 정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형구 역으로 조진웅을 떠올렸고, 그에게 제일 먼저 건넸다. “너무 낯선 이야기고,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던 진웅이가 이 영화에게 출연할 가능성은 5%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건넨 지 하루 만에 출연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혹시 선배가 감독 데뷔한다고 해서 의리로 출연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도 가졌지만 “제가 미쳤습니까. 그런 이유로 출연을 결정하지 않습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시나리오가 뭔가 특이해요. 제가 나오는 장면은 토씨 하나도 고치지 말아 달라”는 말까지 덧붙여 정 감독은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됐다.
그제야 아버지 같은 김유진 감독과 형 같은 이준익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두 감독도 이 낯선 시나리오에 지지를 보냈으며, 정 감독은 모난 돌 같은 ‘사라진 시간’에 정을 가하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진웅을 통해 만난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정원석 대표까지 가세해 상업영화 시스템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나를 자극할 무언가를 찾아서
“어릴 때 이창동 감독님의 ‘초록물고기’ 연출부 막내도 했지만 감독은 어릴 때 꿈이고, ‘했다가 망신당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 겁도 났다. 그런데 망신당하더라도 해보기로 용기를 냈다”는 정 감독은 “촬영하는 동안 행복했다”는 말로 연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한 지난 4년을 갈음했다. “촬영을 마치고 1주일간 앓아누웠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정성껏 촬영에 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관객의 선택과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정 감독은 “관객의 호불호가 나뉠 것이다. 좋은 말만 들으면 바보가 되는 것”이라며 ‘사라진 시간’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차기작에 대해 “소재가 있지만 진전을 안 시키고 있다. 한 작품이야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도 그러면 너무 이기적이다. 가치 있는 영화여야 한다. 개봉을 마치고 곰곰이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배우라는 안전한 보호망을 벗어나 오랫동안 꿈꿨던 연출에 도전하며 예술가의 열정을 불태운 정진영의 용기에 지지와 박수를 보내다가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바쁜 일상을 살며 무뎌져가는 꿈과 열정에 자극을 줘야겠다는 것이다. “나를 자극할 무언가를 계속 찾아야 한다. 자극을 받고 그것을 통해서 내 안의 세포가 반응을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