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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 기자의 영화 人 a view] 영화 ‘나는보리’ 김진유 감독

소리를 잃고 싶은 소녀 성장기…“저도 한때 청각장애인 되길 원했죠”

  •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
  •  |   입력 : 2020-05-19 19:15:28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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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인 부모에게서 자란 김 감독
- 본인 유년기 소녀 보리에 투영
- 영화 독학으로 배워 힘들게 완성

- 고향서 찍고, 친척이 엑스트라로
- 수어 연기 노력해준 배우들 덕
- 보편적인 가족의 정서 잘 담아내

- BIFF 韓영화감독조합상 받고
- 애정 식었던 영화의 길 전념
- 서퍼·해녀 사랑이야기 준비 중

최근 독립영화를 보면 어른들은 몰랐던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이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14세 중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김보라 감독의 ‘벌새’처럼 아이 혹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여러 편 있다. 이 영화들은 성인들에게는 유치해 보일지 모르는 아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추억의 책장을 들추게 만드는 한편, 힘들다고 느껴지는 삶 속에서 다시 용기를 갖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김진유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나는보리’(개봉 21일) 또한 시나브로 아이가 느끼는 감정 하나하나에 공감을 하게 되고, 영화가 끝나면 한 뼘 더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여운이 긴 작품이다. 특히 코다(CODA·농인 부모에게서 자란 청인 자녀)로 자란 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는 우리가 몰랐던 다른 세상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 작품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제24회 독일 슈링겔국제영화제 관객상&켐니츠상 2관왕, 제18회 러시아 스피릿 오브 파이어 영화제 유어 시네마 섹션 최고 작품상, 제20회 가치봄영화제 대상 등 다수의 영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나는보리’가 어려운 시기에 관객과 만나게 됐는데 따뜻하고 행복한 영화이니 많은 분이 보시고 포근한 마음을 얻어 가면 좋겠다”는 개봉 소감을 전했다.

■소리를 잃고 싶은 11살 보리

   
농부모에게서 자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와 비장애를 뛰어넘어 모두가 불편함 없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나는보리’를 연출한 김진유 감독. ‘나는보리’는 소리와 고요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열한 살 보리의 성장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김정록 기자
초등학생 4학년인 보리는 매일 소원을 빈다. 소리를 잃게 해달라고. 열한 살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실은 보리의 부모와 남동생은 농인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청인인 보리는 가족을 대신해 짜장면도 주문해야 하고, 전화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만 외톨이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도 다른 가족처럼 소리가 없어졌으면 한다.

‘나는보리’의 주인공 보리를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법한 이야기다. 소리를 듣기 때문에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낀다고? 그렇지만 보리처럼 코다로 자란 김 감독에겐 특별하지 않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를 대신해서 알지도 못하는 은행 업무를 봐야 했고, 집으로 오는 전화를 다 받아야 했다.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제가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리가 안 들렸으면 했던 적이 있다.” 이런 생각은 비단 김 감독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5년 전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주최한 ‘수어로 공존하는 사회라는 행사’에 연사로 참여했을 때 그 자리에 참석한 또 다른 연사였던 농인 수어통역사 현영옥 씨가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똑같아지고 싶어서 소리를 잃고 싶었다고 하더라. 게다가 소원이 이뤄져서 현재 농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는 일화를 떠올렸다. 이 말에서 모티브를 얻은 김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섞어 ‘나는보리’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소리를 잃고 싶은 보리는 결국 TV 속 한 해녀가 깊은 바다에 자주 들어가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인터뷰하는 것을 듣고 바다로 뛰어든다. 그리고 아버지의 구조로 살아난 보리는 귀가 들리지 않는 척 한다. 아버지는 보리에게 “사실은 아기 때 네가 안 들리게 태어난 줄 알고 기뻤다”고 수어로 말한다. 농인 부모는 당연히 청인 자녀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장면은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제가 만났던 농인 부모 중 60% 정도가 자녀가 농인으로 태어나길 바랐다. 농인이라는 것 자체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코다를 키우면 어렸을 때는 괜찮은데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자녀와 멀어지는 경험을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

   
영화 ‘나는보리’ 촬영 현장에서 (앞줄 왼쪽부터) 이린하 김아송 황유림과 함께 치킨 파티를 하고 있는 김진유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나는보리’의 미덕은 농인 가족이 등장하지만 비장애인 가족과 다르지 않은 보편적 정서를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는 사춘기에 접어드는 소녀가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느낄 법한 소외감을 소재로,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을 표현했다. 주인공 소녀가 코다라는 점이 특별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다름보다는 같음을 느끼게 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게 한다. 김 감독은 “처음부터 장애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리의 감정에 집중했고, 그 감정선을 따라 보리 가족의 모습을 묘사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기존의 장애를 다룬 영화와 차별점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나는보리’를 공감의 드라마로 만들게 한 1등 공신은 실제 가족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 배우들이다.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한 보리 역의 김아송과 동생 정우 역의 이린하, 그리고 김 감독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는 보리 부모 역의 곽진석과 허지나(두 사람은 실제 부부다)에게 중요했던 것은 수어 대사였다. 청인을 상대로 수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조희경 수화 통역사와 배우들의 노력으로 어설프지 않은 수어를 구사하게 됐다. 김 감독은 “이린하가 긴 수어도 잘 해줘서 너무 고마웠고, 곽진석 허지나 부부는 연습한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보내줬다. 너무 정확하게 수어를 해서 오히려 힘을 빼고 조금 흘려서 수어를 하도록 할 정도였다”며 배우들을 칭찬했다. 무엇보다 어린 두 배우의 연기가 돋보일 수 있도록 기다리고 배려해 준 곽진석 허지나 부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독학으로 배운 영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가족 사이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한 살 보리가 가족들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에 특별한 소원을 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는보리’. 영화사 진진 제공
‘나는보리’는 김 감독이 출생하고 자란 강원도 주문진과 강릉에서 촬영됐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촬영에도 많은 이점이 있었으며, 특히 주문진에는 지금도 친척들이 살고 있어 비용 절감 차원에서 영화 속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영화 속에서 마을 평상에 앉아 있던 주민들이 고모와 큰엄마였다. 이외에도 정우 담임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김 감독은 강릉시네마테크를 찾아가 매주 영화 모임을 가졌으며, 매해 정동진독립영화제 자원봉사를 하며 영화에 대한 사고를 넓혔다. “곽진석 배우도 2008년 ‘나는 액션배우다’로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찾았을 때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감독은 스물한 살 때 서울에 올라와 MBC ‘우리 결혼했어요’의 FD를 하다 군 입대를 했다. 제대 후 드라마 연출 제작부를 하며 촬영 현장을 경험했고, 영화를 하고 싶어 상업영화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맨날 밤샘 작업을 하는 나날이었다. 영화에 대한 환상이 다 깨졌으며 애정이 식었다. 그런데 정동진독립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니 다시 만들고 싶어져서 여기까지 왔다.”

힘들게 자비를 들여 만든 ‘나는보리’는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나는보리’를 힘들게 완성해서 다시 영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던 때에 상을 받게 됐다. 특히 감독 선배님들이 주는 상이라 또 한 번 해보라는 느낌이 들더라. 마음을 고쳐먹고 계속 영화를 하기로 했다.”

   
영화감독의 길을 확정한 김 감독은 현재 농인 20대 여성 주인공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와 바다를 두고 서핑을 즐기는 남자와 생계 때문에 물질을 하는 해녀의 사랑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고 있다. 독학으로 영화를 배웠으며, 사람에 대한 애정과 순수함을 지닌 김 감독이기에 차기작에서 그려질 사랑 이야기가 더욱 기다려진다.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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