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 유럽 대항해시대 열려
- 서양인 동아시아 바다에 도달
- 중화문명권 변방국이었던 日
- 中 일변도 문화유입 상황 탈피
- 조선, 중국을 통해 서학 수용
- ‘북학’‘실학’ 등에 바탕됐지만
- 광범위한 기술분야엔 무관심
- 인식의 한계가 전파 더디게 해
- 19세기 초 정부·보수층 탄압에
- 서구 문물 유입 암흑기 맞아
- 선비들 관념적·이론적 성향 탓
- 그리스도교만 꾸준히 성장
- 1880년대 고종 위시한 관료들
- 상하이 ‘강남제조국…’등 출판한
- 한역서학서 다시 수입하지만
- 일제 식민지돼 오래가지 못해
조선에서 서학의 도입은 1603년 이광정이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한역 세계지도를 갖고 들어온 것을 기점으로 본다면 17세기 초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17세기는 바다의 시각에서 볼 때 ‘경합하는 바다’라는 규정이 본격화되었던 시대였다. 이미 16세기에 서구의 대항해시대가 열렸고, 이로 인해 서양인의 배가 명을 중심으로 한 조공·해금체제가 흔들리던 동아시아 해역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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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청나라 때 상하이의 강남제조국 번역관에서 일하며 서양 지식을 중국에 전한 존 프라이어(John Fryer, 1839~1928·왼쪽 사진)와 존 프라이어가 청나라에서 펴낸 월간 ‘격치휘편’. |
해상(海商)의 활동으로 사람과 사물의 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동아시아 해역이 세계 규모의 시장과 연결되는 동시에 하나의 중심이 되었다. 다양한 문물의 수용과 유통도 활발해졌다. 이 변화는 특히 중화문명권에서 늘 변방에 위치해 있던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 일변도의 문화 유입이라는 상황을 바꾸게 했다.
곧 일본이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을 수행하고, 이를 계기로 명나라와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배경으로 해상에서 이뤄진 거대한 교역과 문물 교류에서 비롯됐다. 동서양 해상의 무역을 바탕으로 한 이처럼 큰 이동과 교류의 시대를 조선은 당시 중국으로 간 조공사절단을 통해서 맞이했다. 소위 조선의 서학 수용은 예전처럼 단지 중국을 경유해서 이루어졌던 셈이다.
■성리학이 박물학을 누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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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실이 수집한 중국 자료를 소장한 서울의 규장각 내부 모습. |
이렇게 들어온 서학은 조선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7세기 중엽 청나라가 건국한 뒤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조선을 개혁하자는 주장을 펼친 북학(청학)이 등장했다. 이 북학은 청국에 대한 실제적 연구와 당시 청국에 들어온 서학의 수용을 바탕으로 전통 한학을 상대화할 수 있었다. 또 북학에 이어 18세기에 등장한 실학은 이용후생을 제창함으로써 무역과 상업을 발전시켜 국가재정의 발전과 국민생활의 개선을 도모하고자 했다. 북학이나 실학은 모두 중국을 배우는 학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을 통한 서구 학문의 수용이었다.
그런데 두 학문은 서구를 특화시켜 일반화하지 못한 채 서학을 단지 조선의 개혁을 위한 또 하나의 중국 신학문으로 받아들였다. 이 점은 18세기 조선 근대화의 한계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서학은 천문 역법 지리 의학 종교 및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범위는 대단히 넓다. 그런데 실학자들조차도 종래의 유학 곧 성리학을 상대화하는데 중국에서 들여온 서학의 일부를 사용했을 뿐 자연과학과 기술 분야에 해당하는 서학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이는 박물학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과도 관련된다. 당시 조선 유학자들은 다양한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대체로 부족했던 듯하다.
■서학(西學)에서 서교(西敎)로
그리스도교는 조선에 전래되어 많은 신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의 그리스도교는 꾸준히 성장하였는데, 한글본 성경이 만들어지는 등 교세는 조선 정부의 수차례 박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확장을 두고 한국 근대화의 뒤처짐을 일본과 비교하면서 서학이 서교로 대치되었던 데 기인한다고 비판한 역사학자도 있었다. 해상과 ‘근세국가’가 동아시아에서 공생하는 이른바 ‘공생의 바다’에 돌입한 19세기 초에 오히려 조선은 약 60년간 서학 수용의 암흑기를 맞이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는 조선 정부와 보수층의 반대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다양한 선교단체의 활동으로 뿌리를 내려갔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서학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조선 포교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추구한 성리학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데아 속에서 겹치고 틀리고 하는 인식론적 과정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다. 이처럼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유학자들의 사고가 거꾸로 박물학적 관점에서 토착적인 지식의 생산 그리고 이와 관련된 서학의 수용을 더디게 했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상하이와 한역서학서
서교가 아닌 서학으로 복귀하는 것은 1880년대에 와서야 가능해지는데, 서학의 주요 수입 대상 역시 중국이었다. 한역서학서를 중국에서 집중적으로 수용하는데, 수용의 주체는 바로 고종을 위시한 관료집단이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서학서 출판의 중심은 상하이였다. ‘상하이 지식네트워크’라고 할 만큼 19세기 중엽 중국에서 서학은 서양선교사 외에 중국인 관료나 유학생 등이 참여한 여러 단체에 의해서 보급됐다.
처음에는 ‘모리슨 교육회’와 ‘중국 실용지식 보급회’를 비롯해 ‘묵해서관(墨海書館·1844)’ 등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가 주도했다. 이후 1860년대 들어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 상해광방언관(上海廣方言館), 강남제조국번역관(江南製造局飜譯官)이 설립되어 활동했다. 이외에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격치서원(格致書院· 1876)’ ‘익지서회(益智書會·1877)’ ‘광학회(廣學會·1887)’ 등이 19세기 후반 중국에서 서학 보급에 종사했던 대표적인 단체나 조직이다. 광학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서학의 보급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활동은 일차적으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넓게는 ‘한자문화권’ 전체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조선의 뒤늦은 서학 수용
왕실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규장각을 비롯해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당시 조선에 수용되었던 한역서학서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앞선 두 기관에는 1868년 강남제조국 번역관과 여기서 근무한 프라이어(J. Fryer) 등이 쓴 책이 상당수 보관되어 있다. 이 책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는지, 또 어떻게 국내에 유통됐는지는 연구과제다.
프라이어의 책 목록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자연과학과 관련된 것이다. 프라이어는 전자기학과 화학의 지식이 실린 ‘전학도설(電學圖說)’과 ‘화학감원(化學鑑原)’ 등을 한문으로 번역했는데. 이와 같은 서양 과학책은 조선 정부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 속속 조선에 유입됐다. 이와 함께 그는 석탄 채굴이나 철광 제조와 같은 기술 분야 책도 집필했는데, 이 역시 조선 정부의 수요에 따라 수입되었다. 또 프라이어는 1876년 월간지 ‘격치휘편(格致匯編)’(1876-1892)을 창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한문으로 번역·소개하였다. 이 밖에 서양의 사회과학 지식도 중국을 거쳐 조선에 전해졌다고 한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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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덕
부경대
HK 연구 교수 |
하지만 이런 뒤늦은 작업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한국 사학자의 말처럼 한국의 근대화에서 서학은 3단계 경로로 전개되었는데, 개항기의 한역 패러다임과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패러다임 그리고 냉전 시기의 영어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조선 중엽부터 개화기의 한역서학서 수용과 유통 과정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의 상황에 대한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때다.
서광덕 부경대 HK 연구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HK+ 사업단,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