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내 자세는 필립 황태자를 흉내 낸 것이었다. 그 사람은 항상 그렇게 서 있다.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고 평생 누군가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두 손을 등 뒤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문을 열 필요도 뭔가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아마 그는 칫솔에 치약을 묻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그의 집사가 할 일이니까.”(91쪽)

노동계급 출신인 유명 영국 배우 마이클 케인이 생전 처음 중요한 배역으로 맡은 상급 장교를 연기했던 때를 떠올린 말이다. ‘엘리트 제국의 몰락’ 저자인 독일 사회학자 미하엘 하르트만은 이 대목에 ‘한 사람의 출신 성분이 신체 언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식으로 들 수 있는 예가 한둘이 아니다. 명문대 입시나 거대 기업 입사 면접에서 언제나 좋은 점수를 받는 주체성, 당당함, 여유, 유머 등은 시골 출신의 가난하지만 명석한 지원자에게 (대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수줍음, 머뭇거림, 당황 등과 인연이 멀다. 그건 어릴 때부터 부유하고 거리낄 것 없이 자라 성인이 된 뒤, 비슷한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를 이뤄 살아온 사람들 것이다.

엘리트주의에 관해 독하게 연구한 미하엘 하르트만은 ‘엘리트 제국의 몰락’을 통해 독자를 놀라게 한다. 그런 대목은 여럿이다. 먼저, 엘리트에 관한 저자의 집요한 연구가 실증적 자료와 수치를 통해 풍부하게 드러난다. 엘리트라는 낱말에서 떠오르는 다소 막연한 ‘구름’을 이 책은 걷어버린다.

또,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최근까지 엘리트들이 맺은 동맹이 결국 신자유주의 전성기로 이어지면서 불평등, 불공정을 더욱 심화시킨 사례를 파헤친다. 이 과정에서 엘리트들 간의 동질성이 심화되고 ‘끼리끼리’ 폐쇄성이 강해지면, 정치와 경제에서 민주주의가 손상되고 분배 구조가 뒤틀린다고 밝힌다. 또 한 가지 있다.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분석한 책인데도, 지금 한국의 상황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싱크로율’이 높아 마치 한국 현실을 보는 듯하다. 책은 ‘제3장 엘리트는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하는가’ ‘제4장 공익보다는 사익, 엘리트 제국의 규칙’ 등으로 이뤄졌다.

저자는 엘리트 제국의 몰락 조짐과 조건, 필요성을 진단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맞이하기 위한 방략을 쓴 제5장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정치는 가능한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모색하는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이다.

조봉권 문화전문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