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통일 후
- 정세 안정돼 지리정보 관심 급증
- 서양과 접촉 후 측량기술도 발전
- 열도 전체 정밀 지도 제작 노력
- 석천류선·마연자고암 등이 제작
- 지역 명소·도로·숙박업소 표기된
- 상업적 지도는 일반인에 팔기도
- 사절단 통해 입수한 日 새 지도
- 조선 정부 중요하게 처리 안 해
- 사신단 끊긴 뒤 정보 완전 단절
1471년 편찬된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는 동시대의 어떤 일본 지도보다 크고 자세한 지도였다. 이 지도를 통해 우리는 조선 전기의 일본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에 시기적으로 근접하는 지도 한 장이 최근에 일본에서 확인되었다. 히로시마 역사박물관은 올해 7월 15일 ‘일본부상국지도’를 공개했다. 가로 122㎝, 세로 57㎝인 이 지도는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전체를 그린 지도 중에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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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석천류선이 그린 본조도감강목 계열의 일본 지도(위)와 마연자고암이 그린 대일본총도 계열의 일본 지도. 마연자고암 지도의 왼쪽 동그라미 친 곳이 나가사키 가도이다. 이근우 제공 |
지도에서는 서쪽이 위이고 동쪽이 아래이며, 교토를 기점으로 각지로 연결되는 육로와 해로가 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항로 상의 항구의 이름이 많이 기재돼 있어서, 해운이 활발하였던 무로마찌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지도는 14세기 중엽 이후에서 1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하며, 지도의 기본적인 틀은 고대적인 인식 위에 중세의 새로운 지식을 추가한 것이다.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 역시 그러한 예이다.
■근세 일본의 지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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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의 서기로 일본에 다녀온 원중거가 개인적으로 편찬한 책 ‘화국지’에 실린 일본 지도 ‘팔도68주전도’. |
그러나 무로마찌 시대 후기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서양 선박들이 일본의 변경 지역에 나타났고, 서양의 지도와 지구의(地球儀)도 전해졌다. 에도시대 들어 일본 국내 정세가 안정되면서, 비로소 전국의 지리정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측량기술도 발전하였다. 전국적인 측량사업이 진행되었고, 지역별로 제작한 지도를 모아 일본 열도 전체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에도막부가 작성한 정밀한 지도는 기밀이었으나, 일본 열도의 전체 윤곽과 기본 정보를 담은 지도는 민간에 공개됐다. 신사 참배와 명소 관광이 유행하면서, 각 지역 도로와 숙박지에 대한 정보가 지도에 담기게 되었다. 드디어 상업적인 지도가 제작돼 일반인에게 판매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지도들이 연이어 나타났으며, 일본에서 석천류선(石川流宣)이 그린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 계열, 마연자고암(馬淵自藁庵)이 그린 대일본총도(大日本總圖) 계열, 장구보적수(長久保赤水)가 그린 일본여지로정전도(日本輿地路程全圖) 계열이 대표적이다.
■통신사들이 가져온 일본 지도
그중 조선에 전해진 것은 석천류선이 그린 지도와 마연자고암이 그린 지도였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는 ‘일본여도’라는 지도를 남겼는데, 이 지도는 석천류선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윤두서의 생존연도(1668~1715), 석천류선의 지도가 제작된 시기(1687~1703), 통신사가 왕래한 시기(1682, 1711, 1719년)를 고려하면, 1711년에 조태억을 정사로 한 통신사가 가져온 지도를 윤두서가 입수해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연자고암이 그린 지도를 가져온 것은 영조 39년(1673)에 파견된 조엄을 정사로 한 통신사였다. 정사 조엄은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통신사 일행은 특별히 풍부한 기록을 남겼다. 정사 조엄은 통신사 기록을 모아 ‘해행총재’를 편찬했고, 제술관 남옥(南玉)은 ‘일관기(日觀記)’, 서기 원중거(元重擧)는 ‘화국지(和國志)’와 ‘승사록(乘槎錄)’, 서기 성대중(成大中)은 ‘사상기(槎上記)’와 ‘일본록(日本錄)’을 남겼다.
원중거의 ‘화국지’에는 여러 장 일본 지도가 실려 있고, 성대중이 가져온 지도도 현재까지 남아있으며(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에도 ‘조선사자용 일본지도’라는 제목의 일본 지도가 전하는데, 이 지도 모두 마연자고암의 지도이다. 이 지도는 조선 전기의 일본 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다.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처럼 여러 장의 지도로 구성돼 있지만, 지도 내용은 다르다. 전자에는 해로 상의 주요한 포구를 제외하면 내륙의 지명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에는 규슈의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도로를 따라서 수십 개 지명이 빼곡하게 기록돼 있다. 이 길은 북규슈의 고쿠라에서 규슈 서쪽 나가사키로 이어지는 나가사키 가도이다. 당시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중심지가 된 나가사키에 이르는 도로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조선통신사는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외국의 정보를 가져온 메신저들이었다. 원중거는 일본에서 일본지도를 입수해 조선으로 가지고 왔는지, 일본에서 지도를 베껴서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상황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해동제국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책이고, 당시 영의정이던 신숙주가 편찬을 지휘하였다. 또한 이 책은 후대까지 조선이 일본에 대응하는 기본적인 지침서로 기능하였다. 당연히 조선 시대 후기까지 여러 차례 재판을 거듭하였다.
■양극화되는 일본 지도
그러나 ‘화국지’는 원중거라는 중급 관인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편찬한 책이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32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후 하급 관리로 근무하다가 1763년 계미사절단의 서기로 발탁돼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몇몇 관직을 거쳐 규장각에서 같은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해동읍지’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의 책 속에는 당시로서는 조선에서 가장 정밀한 일본지도가 실려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통신사 일행이 입수한 일본 지도는 당연히 국가 차원의 중요한 정보로 규장각과 같은 국가기관에 소장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화국지’는 이덕무(李德懋), 성대중(成大中),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등과 같이 북학파 연암 그룹에서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듯하고, 책 속 지도를 이덕무의 ‘청령국지’에 그대로 전재한 경우도 있었다. 새롭고 자세한 일본 지도는 공교롭게도 대부분 서얼 출신들이 남긴 것이다. 성대중, 원중거, 이덕무가 그렇다.
그러나 새로운 일본 지도에 대해서 조선 정부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원중거의 ‘화국지’도 유일본으로 일본에만 남아있다. 비변사에서 제작한 ‘각국도’에도 성대중이 가져온 지도가 들어있지만, 조선이 제작한 지도는 훨씬 개략적이고 단순한 지도로 변해 있다.
또한 이들은 인쇄된 지도가 아니고 손으로 그린 지도다. 오히려 인쇄되어 유통된 일본 지도의 대부분은 대단히 조잡하고 왜곡된 형태다. 일본 지도를 중심으로 보면, 일부 서얼 출신의 지식인들이 일본 지도로 상징되는 일본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국가 전체로 보면 그 관심은 대단히 미약한 것이었다. 동시에 1763년 이후 조선은 더 이상 일본 본토에 사신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에 대한 정보는 단절되었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공동기획:부경대 사학과·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