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타고 출렁이듯 생동감 넘쳐

- 부산 출신 김은주 작가 개인전
- 14일까지 해운대구 아트소향

연필 딱 한 가지 재료만 사용했는데 수천 가지 빛깔이 난다. 사람과 꽃이 바람을 타고 일렁이다 종이를 뚫고 눈앞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김은주 작가의 ‘가만히 꽃을 그려보다’(2016, 140㎝×310㎝). 아트 소향 제공

연필 하나로 경이로운 작업을 하는 부산 출신 김은주(53) 작가가 4년 만에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초기 ‘인체’를 그린 작품부터 최근 ‘꽃’을 그린 신작까지 작가의 세계 전반을 볼 수 있는 15개 작품을 선보인다.

김은주 작가가 지금껏 그린 인체, 파도, 꽃은 많은 작가가 즐겨 그린 소재다. 그럼에도 김은주의 작품이 특별한 것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는 ‘연필’로만 30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매우 크다. 이번에 선보이는 가장 큰 작품 ‘그려 보다’(2016)는 높이 2ｍ34㎝, 길이 21ｍ에 이른다. 작품을 이루는 셀 수 없이 많은 선을 그리기 위한 ‘노동집약적’ 행위는 경이롭기만 하다. 그의 그림 그리는 행위는 마치 득도를 향해 나아가는 수도자의 수행 같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 작가는 “직장생활을 하며 사람과 사회시스템에 실망하는 일이 있었다. 대학 때 주로 배운 익숙한 유화만으로는 변해버린 나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림을 못 그리고 고민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로잉을 생각해냈다. 결국 가장 좋아하는 재료, 연필만 남았다. 전략적인 접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고 계기를 설명했다.

	부산 해운대구 아트소향에서 김은주 작가가 큰 규모의 작품 ‘그려 보다’(2016, 234㎝×2100㎝) 앞에 선 모습.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그의 작품은 검은색이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수많은 색을 낸다. 한 가지 색만 낼 수 있는 한 가지 재료만 사용하지만, 총천연색 유화보다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는 “작품이 한 번도 무채색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옛 어르신들이 먹 하나로 수천 가지 색을 냈듯 연필에서 수천 가지 빛깔을 보려 한다”는 것이다. 불가능 속의 가능, 김은주의 30년 작품 세계를 압축하는 말이다.

김은주의 작품에는 ‘부산성’이 있다. ‘바람’의 역할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2차원 드로잉이지만 인체와 파도와 꽃이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부산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작품에 표현됐다”고 했다. “서울에 가면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지만 부산에는 항상 바람이 불잖아요. 제주의 거친 바람과는 또 달라요. 내가 이 움직임 속에 살았고, 이 지역을 사랑하는구나 하고 나중에야 깨달았죠.”

“그림 그리기 전에 가만히 앉아 제 마음이 굽어지고 틀어진 데가 없는지 봐요. ‘찌그러진’ 곳이 있으면 시작하지 않아요. 제 마음이 가장 활짝 폈을 때, (두 팔을 하늘로 쭉 뻗은 채) ‘와’ 할 때 그려요. 에너지를 담기 때문이죠.” 그의 작품에는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인물 군상은 프레임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다는 듯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오려 몸부림친다. 아버지 49재를 지낸 절에서 본 ‘목단’에서 영감을 받은 꽃도 마찬가지다. 소재는 달라졌지만 “에너지를 담는다”는 작품 의도는 같다. 소재는 단순한 시각적 형상일 뿐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아우라고, 생명의 에너지다.

김은주는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외 미술계의 조명을 더욱 많이 받고 있다. 2016년 서울 포스코미술관에서 큰 규모 개인전을 열었고, 해외의 주목할 만한 전시에도 초청되고 있다. “30대 때는 아무도 작품을 사지 않았다”는 작가가 이룬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오는 14일까지 ‘아트소향’(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 무료. (051)747-0715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