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종일 물질해야 했던 해녀
- 가족들 삼시세끼 먹이기 위해
- 감자 넣고 지은 밥 양푼에 담고
- 바로 잡은 해산물로 만든 국에
- 텃밭서 기른 채소 낸 밥상이 원조
- 빙떡·옥돔조각구이·전복양념찜 등
- 제주산 토종 재료로 만든 전식과
- 전통적인 낭푼밥상 구성된 본상 등
- 2시간 동안 건강식 향연 펼쳐져
낭푼.
제주의 음식문화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떠올려야 할 낱말이다. 낭푼은 양푼을 이르는 제주 말이다. 사전적 의미로 음식을 담거나 데우는 데 쓰는 그릇을 말한다. 이 낭푼이 제주 음식문화에 아주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먹을거리를 자기가 해결해야 할 정도로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생활상이 고되었다. 특히 여성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노동으로 식구들 먹을거리를 해결해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그 대표적 직업군이 제주 해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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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향토음식 전문 한식 레스토랑 냥푼밥상의 ‘낭푼밥상 코스 요리’ 상차림.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제공 |
하루 내내 바다에서 물질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당시 해녀들은, 가족의 삼시세끼를 일일이 직접 차려 줄 순 없었다. 그래서 물질 가기 전, 소반 중앙에 지슬(감자)을 넣고 지은 밥을 큰 낭푼에 가득 담아 올려놓고는, 어느 때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차려두었다. 집 뒤편 우영밭(텃밭)에서 사시사철 푸르게 자라는 각종 채소를 솎아 쌈거리와 노물(나물)로 내고, 바릇잡은(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로 만든 제철 바릇국에 몇몇 젓갈과 삼삼하게 발효시킨 생된장으로 상을 차려냈다. 이렇게 차려낸 밥상을 ‘낭푼에 담아낸 밥상’이라고 하여 ‘낭푼밥상’이라 불렀다.
■ 낭푼에 밥과 갯물과 노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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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향토음식명인 1호 김지순 명인과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 모자. |
이렇게 ‘낭푼밥상’은 옛 제주 사람들이 일상에서 흔히 차려 먹던 상차림을 말한다. 바쁜 시간 속에서 큰 낭푼에 밥을 가득 퍼 놓고는, 갯물(바다 것들)이나 노물(나물) 몇 개에 식구 수대로 따로 국만 올려놓고 먹던 밥상이었다.
밥은 보리를 주식으로 조, 콩 등 잡곡과 계절에 따라 감자, 고구마, 쑥, 바다의 톳, 파래 등을 넣어 지어 먹었다. 때에 따라 ‘산듸’라는 밭에서 나는 쌀을 섞기도 했다고. 계절 따라 밥을 담는 낭푼도 달랐는데, 밥이 잘 쉬는 여름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차롱’에 보리밥을, 겨울에는 나무나 놋낭푼에 조밥을 해서 먹었다.
밥을 늘려 먹기 위해 다양한 잡곡과 해조류를 섞어 먹었기에 입안의 식감이 흔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가슬가슬한 밥을 잘 넘기려면 제철 바릇국(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로 만든 국)이나 구수한 날된장에 식초를 풀어서 만든 다양한 물회 등이 낭푼밥상에는 필히 올라야 했다. 우영밭의 채소 쌈도 궁합이 맞는 좋은 먹을거리로, 제주에서 많이 어획되는 자리돔이나 멜(멸치)로 담근 젓갈과 함께 한입 크게 쌈을 싸 먹기도 했을 것이다.
“낭푼밥상은 제주의 문화원형을 대표적으로 담은 밥상입니다. 생업에 매달려야 했던 제주 여성의 일상이 만든 ‘단출한 밥상’이었고, 바다에서 바로바로 ‘바릇잡이’한 ‘제철밥상’이며, 척박한 제주의 자연환경 속에 자라난 노물(나물)로 만든 ‘건강한 밥상’입니다. 제주의 건강한 음식문화가 낭푼밥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 양용진 원장의 말이다.
■ 제주향토음식 전문 ‘낭푼밥상’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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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우럭 콩조림 |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척박한 화산지형과 대표적인 절해고도 유배지 그리고 일제강점과 제주 4·3 항쟁 등 근현대의 착취와 억압의 역사가 고스란한 곳이 제주였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열악한 배경을 안고 있는 곳에서 풍성한 섭생을 누리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제주 전통의 서민밥상이던 낭푼밥상은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제주 사람들의 생활양식 변화와 외부 식문화 유입, 경제성장에 따른 식생활 향상 등이 표면적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보기 싫은 곤고한 역사와 생활상을 기억하는 음식이었기에, 혹 잊히는 것은 아닌지 유심히 돌아봐야 할 일이기도 하겠다.
이 낭푼밥상 취재를 하다 보니 제주의 전통 낭푼밥상을 기록·보존하면서 계승하는 곳이 있어 들러보았다. 제주향토음식명인 1호 김지순 명인과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양용진 원장 모자가 운영하는 제주향토음식 전문 한식레스토랑 ‘낭푼밥상’이다. 제주산 토종 식재료만을 고집하면서도 현대인 입맛에 맞는 건강한 밥상을 차려내는 곳으로, 전통의 낭푼밥상과는 달리 제주 향토음식과 대화하듯 탐식하듯 두어 시간 동안 코스 음식이 펼쳐진다.
■ 제주의 자연과 문화 음미하는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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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실밥(감자밥)과 바릇국(바다국) |
밥상을 받는다. 정갈하고 깔끔한 상차림이 인상 깊다. 전식으로 10여 가지 제주 토속음식이 차례차례 선보인다. 우선 제주 토종닭이 낳은 유정란으로 조리한 ‘독새기(달걀) 반숙’이 나온다. 고소한 참기름을 곁들였다. 깊고 진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식욕을 돋운다. 다음으로 나온 제주산 푸른 콩으로 담근 된장소스에 곁들인 ‘쌍노물(제주 배추) 샐러드’는 아삭아삭한 맛이 봄을 씹듯 신선하다. 제주 메주콩과 산듸쌀(제주 밭쌀)로 쑨 ‘콩죽’에 물김치가 이어 오른다. 고명으로 ‘꿩마농(꿩마늘, 달래)’을 올려 고소하면서도 싱그러운 맛이 입안 가득 차오른다.
다음, ‘빙떡’과 ‘옥돔조각구이. 빙떡은 제주에서 많이 나는 메밀로 전을 부치고, 채 썬 무를 올린 뒤 돌돌 말아 먹는다. 옥돔은 제주 사람들의 최고 생선 중 하나. 삼삼한 빙떡에 고소하고 짭짤한 옥돔구이 조각을 곁들여 먹으면 이 또한 환상 궁합이다. 새우, 오징어, 고사리를 넣은 ‘고사리해물전’, 독새기 지단 위에 돼지고기 완자를 올려 말아서 먹는 ‘미수전’, 쪽파와 고사리 등을 꾹꾹 눌러가며 전을 부친 ‘느르미전’ 등의 지짐이와 ‘전복양념찜’, ‘날초기(생표고버섯)구이’ 등도 속속 올라온다. ‘한치무침’과 ‘제주 흑돼지수육’이 전식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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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떡과 옥돔조각구이 |
잠시 후 본상인 ‘낭푼밥상’이 차려진다. 산듸쌀과 감자로 밥을 지은 ‘지실밥’이 낭푼에 담겨 나오고, 보말, 낚지, 미역 등속을 넣고 끓인 ‘바릇국’, 돼지 가슴뼈 부분을 고우고 메밀가루를 풀어 만든 ‘접짝뼈국’이 앞을 차지한다. 자연산 우럭에 제주 콩을 갖은 양념장으로 조린 ‘우럭콩조림’과 자리젓에 각종 쌈채소가 뒤를 받친다. 개운하고 깔끔한 맛을 내는 김치, 장아찌, 생채, 노물(나물)과 제피된장이 밑반찬으로 낭푼밥상 구성을 마무리한다.
■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
이 모두 제주의 풍성한 자연을 제공하면서도 낭푼밥상의 구성 또한 잘 지켜내는 밥상이다. 낭푼이 가진 전통의 제주 음식문화를 간직한, 그러면서도 현대식으로 재해석해낸 합리적 식단이란 뜻이다. 비록 거칠고 손에 닿는 대로 차린 밥상이지만, 모두 둘러앉아 낭푼에 숟가락을 꽂고 즐거이 먹던 제주의 ‘공동체 밥상’이자 ‘생활문화유산’인 낭푼밥상. 일에 지친 심신을 잠시 쉬게 해주고, 기력과 활력을 북돋워 주던 건강한 밥상이 바로 낭푼밥상이었다.
척박한 땅을 헤치고 올라온 식재료로 차렸기에, 건강하고도 아름다운 한상, 낭푼밥상. 제주의 자연을 오롯이 담은 봄철 제주 낭푼밥상 한 끼로, 온몸이 바야흐로 봄꽃으로 자지러지는 것이다.
음식문화 칼럼니스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