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에 밀리고 직장 내 성희롱 견디며
- 남편과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 등
- 소설로 그려내 부당한 현실 간접 체험
- “선후배, 동료 여성들 삶 복기해봐야”

글을 쓰다 보면 남의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우연히 시작된 상상을 풀어내는 것보다 연애사나 가족사 등 자신이 결부된 사건을 쓰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사건에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의 크기를 적절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기 어렵고, 자칫 심심한 넋두리가 되거나 다짜고짜 신파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면에서 조금 독특한 소설이다. 특별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82년에 태어난 김지영 씨가 아이를 데리고 1500원짜리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다 ‘맘충’이라는 말을 듣기까지, 여성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사건에 대한 연속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지영 씨 부부를 상담한 의사의 시선에서 재구성된 김지영 씨의 삶에 대한 서술 중간중간 사회 통계와 기사들이 언급되거나 각주가 달려 약간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로서는 조금은 낯설고 딱딱할 수 있는 형식임에도,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물론 김지영 씨와 공통분모를 가진 어떤 여성은 읽기 힘들어 중간에 몇 번씩 책장을 덮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부당함과 불편이 제대로 된 서사로 정리된 적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김지영 씨의 삶을 통해 드러난 부분 부분의 사건은 나도 주변 여성의 경험담에서, 사회적 이슈를 통해 한 두 번은 들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남성인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여성의 입장에서 숙고하거나 이해하는 데는 늘 어떤 어려움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여성으로 태어나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30여 년 여성의 삶을 대하고 나니 그들이 겪는 문제가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총체적인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삼촌들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억척같은 엄마, 남동생과 달리 집안일을 하면서도 맛있는 것을 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던 언니, 보안업체 직원의 몰카 촬영과 그 사진을 돌려본 남자 동료들 사이에서 회사를 그만두거나 심리 상담을 받는 여자 직원들, 가계 부양을 위해 최저 임금을 받으며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 나온 주부들…. 각각 개별 사건이 아니라 모두가 수많은 김지영 씨에게 닥쳤거나, 또 닥칠 일이다.

소설 도입부에서 김지영 씨는 가끔 딴사람이 된 듯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장모가 꾸짖듯 남편에게 말하고, 학창시절 여자 선배가 되어 남편에게 당부하기도 한다. 단순한 우울증을 넘어 정신적 해리나 빙의로 느껴지는 김지영 씨의 모습은 섬뜩하면서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후 이어지는 김지영이라는 여성의 삶에 더욱 귀 기울이게 만든다. 이어지는 김지영 씨의 삶에 대한 서술은 감정이 과하게 실리지 않은 무당의 사설처럼 느껴진다.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중얼거림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감정을 싣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긴 서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일부러 감정을 조절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작가는 김지영 씨가 하고픈 말이 있어도 종종 말을 삼키는 대신 사회 통계나 등장인물의 서술을 통해 빈틈을 메우면서 간략하고 선명하게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단면을 하나하나 길어 올리는 데 집중한다.

이렇게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여성의 수난기를 생생하게 간접 체험하면서 그보다 세 살 많은 나의 아내, 50년대생 나의 어머니, 어느 자리에서 선·후배 혹은 동료로 만났던 여성의 삶을 천천히 복기하고 듣는 시간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이 이제 막 4살 된 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한 아빠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문화기획자·청년정책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