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도 씨는 최고의 외화 번역가이며 창조적 상상력의 전파자, 독서가, 저술가이다. '이미도의 결정적 한 장면'을 격주로 연재한다. 영화와 책 그리고 삶에서 '번쩍' 하고 우리를 전율하게 했던 장면을 잡아내 맛깔스런 문체로 전한다. 그림은 헌즈 작가가 맡아주었다. 이미도 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삶 어딘가에도 있다, '시네마 천국' 같은 결정적 한 장면!"

-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 고향 시칠리아서 찍은 영화

#.극장·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토토와 알프레도는 친구가 되고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누빈다

#.30년 후 감독이 된 살바토레
유품으로 받은 키스신들을 보며
삭제된 추억에 미소·눈물 짓고
엔니오 모레꼬네 음악이 깔린다

그림 = 헌즈 작가

"시칠리아를 안 보고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You can't say you've seen Italy if you haven't seen Sicilia)." 대문호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그렇게 극찬했습니다.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도시'라고도 했고요. 그곳과 가까운 바게리아 태생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고향에서 '시네마 천국'을 찍었습니다.

'시네마 천국'은 원제가 '시네마 천국'이 아닙니다. 이탈리아 영화 'Cinema Paradiso'는 '파라다이스 극장'이지요. 추억 속 이름으로 존재하는 보림극장과 닮았다 해도 좋을 곳인데요, 이 작품의 큰 무대가 '낙원'극장입니다. 헐벗던 시절 하루라도 삶이 낙원이길 꿈꾼 필부들의 사랑방입니다.

주인공은 어린 토토입니다. 아버지를 전장에 떠나보낸 소년에게 극장은 행복한 도피처입니다. 한편 좁디좁은 영사실은 소년에게 홈입니다. 벽돌로 지은 게 집(house)이고 사랑으로 지은 게 홈(home)이지요. 그래서 홈은 '행복한 추억이 꽃피어나는 곳(Home is where happy memories grow)'입니다. 그곳에서 토토는 평생 못 잊을 추억들을 꽃피웁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영사기사 알프레도입니다. 정 많은 그가 꿈의 영상을 투사하는 기계, 즉 '꿈의 틀'인 영사기로 빛의 예술을 틀면 어린 토토의 상상력도 덩달아 꿈틀댑니다. 그 상상력은 훗날 소년이 영화 예술가로 성공하는 길마다 소중한 자양분이 돼줍니다.

채플린 영화를 끼워 틀던 시절, 토토가 반한 건 영화만큼이나 경이로운 영사기입니다. 하지만 알프레도는 소년이 '꿈의 틀'에 눈독 들이는 걸 금합니다. 늘 홀로 외롭게 일해야 하고, 말상대라곤 은막 배우뿐이고, 못 배운 자기처럼 가난하게 살게 될까 봐 막는 겁니다. 영특한 소년은 '대부'의 말론 브란도 배역처럼 '거절 못할 조건'을 내밉니다. 그 장면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영화를 못 본 독자를 위해 가려두기로 합니다.

전쟁의 최초 희생자는 순수(The first victim of war is innocence)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수많은 이의 순수가 무참히 짓밟히던 2차 대전 말미에 토토에게도 비보가 날아듭니다. 그즈음 알프레드가 토토와 자전거로 시골길을 달리는 명장면이 나옵니다. "5학년인 제가 영사실엔 못 들어가도 친구는 돼줄 수 있잖아요." 알프레도는 친구이면서 아빠가 되어주기로 합니다. 안 그래도 '거절 못 할 조건'에 응해버린 그여서 마침내 토토에게 영사기를 맡깁니다. 여기까지가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 1부입니다.

심금을 울리는 명화는 다 공통의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변화'입니다. 시련을 이겨낸다거나, 상처를 치유한다거나, 과오를 인정하고서부터 달라지는 캐릭터를 보면서 우리는 그들 삶의 굴곡이 우리의 그것과 닮아있다고 생각해 공감하고 감동하게 되지요. 2부는 토토의 운명을 바꿔놓는 러브스토리입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중년의 살바토레와 엘레나가 재회하길 바라신다면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 173분)'을 추천합니다. 영화를 보신 후 닮은꼴 감동을 줄 소설을 찾으신다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 Love in the Time of Cholera'을 권합니다.

후반부의 문을 여는 사건은 영사실 화재입니다. 그 불로 알프레도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 토토가 극적으로 구해냅니다. 눈을 잃은 알프레도는 생명의 은인인 소년의 얼굴을 구석구석 어루만지며 살갑게 충고합니다. "너에겐 영사기 돌리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기다린단다." 그러면서 천천히 손을 떼면 토토의 얼굴이 청년 살바토레로 바뀝니다.

살바토레는 사랑의 열병을 앓습니다. "낱말 맞추기를 해도 네 이름만 떠오르고 신문을 봐도 네 얼굴만 보여." 그렇게 격정을 고백하는 연인이 생긴 건데요, 첫눈에 엘레나에게 반해 눈멀어버린 그에게 알프레도가 충고합니다. "난 눈을 잃었어도 더 잘 볼 수 있구나." 무엇이 더 잘 보인다는 걸까요. 신분 벽이 너무 높아 결국 살바토레가 못 오를 사랑을 하게 된다는 예측인 걸까요.

영어 표현에 'Romeo is bleeding'이 있습니다. '실연의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를 은유합니다. 살바토레가 그런 로미오입니다. 나고 자란 작은 마을을 세계의 중심지로 여기던 토토와 이별할 때 알프레도는 아버지 심정으로 충고합니다. "인생은 네가 본 영화하곤 달라. 인생이 훨씬 힘들어(Life isn't like in the movies. Life is much harder)."

미국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가 노래했습니다. "가장 슬픈 말은 'It might have been'입니다." 그 뜻은 '아, 그때 잡았더라면!'입니다. 잡지 않았거나 잡지 못해 놓친 과거의 기회를 떠올릴 때 밀려오는 후회를 오롯이 머금은 표현이지요. 살바토레는 30년간 그 슬픈 말을 곱씹으며 살아갑니다.

영화는 플래시백 형식입니다. 자신의 사랑은 해피엔딩 영화와 다르다는 걸 깨닫곤 영영 안 돌아가려던 살바토레에게 알프레드의 부음이 도착합니다. 영화는 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한순간도 그를 못 잊었다는 알프레도는 뜻밖의 유품을 남깁니다. 검열에 잘린 키스 장면들만 모아 붙인 필름입니다. 그걸 보는 살바토레는 미소 짓기도 하고 눈물짓기도 합니다. 그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는데요, 필름을 틀어주는 카메오 영사기사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입니다.

영화감독 살바토레는 '키스 필름'을 보며 '아버지 알프레도'를 그리워했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청년 살바토레와 엘레나의 빗속 슬픈 키스도 떠올리게 되더군요. 감독은 '가장 슬픈 말에 담긴 감정'이랄 수 있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과 그리움'을 우리 가슴 속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리고 싶었는지 엔니오 모레꼬네의 테마 곡을 깔아 대단원을 애잔하게 갈무리합니다.

▶이미도 약력 = 1993년부터 외화 번역 시작. '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 약 520편 번역. 저서 '이미도의 독보적 영어책' '똑똑한 식스팩'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