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은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는 래퍼 에미넴(Eminem)은 디스(disrespect의 줄임말. 힙합씬에서 상대를 비난하는 랩 또는 행위)에 있어서는 도가 텄다. 국내 힙합 팬들에게는 영화 '8마일(8 Miles)'의 지시대명사 격이다. '8마일'하면 에미넴, 에미넴 하면 '8마일'이다. 영화에서 랩으로 '흑형'들 사이를 휩쓸고 다니는 주인공 백인 래퍼는 갱스터 래퍼도 아니면서 갱스터만큼 거친 랩을 구사한다. 또 디스할 때는 화끈하게 실명을 거론한다. 2005년 정규앨범 수록곡 'The Real Slim Shady'에서는 할리우드 톱스타 윌 스미스를 실명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사진 = 에미넴 공식 트위터. 그가 이번엔 총 대신 펜 끝을 겨누었다. 도널드 트럼프에게.)
"Will Smith don't gotta cuss in his raps to sell records. Well I do, so fxxx him and fxxx you too." '윌 스미스는 음반을 팔기 위해 욕을 안 하는데, 나는 욕을 할 거다'고 한다. 그 뒤엔 자꾸 뭘 먹으라고 한다. 번역을 도저히 지면에 옮길 수가 없다. 배우 브루스 윌리스를 겨냥했던 랩도 있다. 2011년 Royce da 69와 작업한 노래 'Welcome 2 Hell'에서다.
"Bruce willis on his death bed, last breath with an infection. fightin' it while he's watching internet porn, about to meet his death with an erection."
'임종 직전의 브루스 윌리스. 감염에 걸려 마지막 숨을 쉬는 중. 인터넷 포르노를 보면서 운명과 싸우는 중'이란다. 마지막 문장 마지막 단어는 수능 때 '직립'이라는 뜻으로 배웠다. 진짜 해석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아무튼 그에게 걸렸다 하면 거의 발가벗겨지고 만다. 그런데 그의 펜 끝이 이번에는 정치인을 겨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다.
(사진 = 도널드 트럼프 공식 트위터. 멈출 줄 모르던 독설가가 독설가를 만났다.)
에미넴이 19일 신곡 '캠페인 스피치(Campaign Speech)'를 발표했다. 특유의 빠르고 몰아치는 랩으로 프리스타일처럼 수많은 가사들을 뱉어냈다. 2012년 흑인 소년 트레이븐 마틴(Trayvon Martin)을 살해한 경찰 조지 짐머맨(George Zimmerman)을 비롯해, 경찰에 의한 흑인 피살 사건이 이어지는 데에 반발해 국가 연주 때 기립을 거부한 NFL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 등 많은 이름들이 희생양이 됐다. 이 중에서도 눈여겨 볼 가사는 트럼프가 언급된 부분이다. 꽤 길다.
에미넴의 신곡 '캠페인 스피치' 뮤직비디오
Run the faucet, I'ma dunk. A bunch of Trump supporters underwater. 수도꼭지 틀어봐, 얘네 물에 빠트릴 테니까. 한 무리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물속에.
Consider me a dangerous man, But you should be afraid of this dang candidate. 내가 위험한 놈이라 치자고. 그래도 이 정신 나간 대선 후보를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걸.
You say Trump don't kiss ass like a puppet. 'Cause he runs his campaign with his own cash for the fundin' 너넨 트럼프가 애완견마냥 돈 있는 후원자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고 하더라. 걔는 자기 돈 가지고 선거 캠페인을 꾸려나간다고 말이야.
And that's what you wanted. A fxxxin' loose cannon who's blunt with his hand on the button. Who doesn't have to answer to no one?great idea! 그게 멋있고 좋단 거지. 근데 그 얘긴, 그 정신 나간 놈이 멋대로 (핵폭탄) 버튼을 누를 수 있단 거야. 왜냐면 다른 사람 눈치 안 봐도 되니까, 멋진 생각이군!
그런데 트럼프는 대선 기간 거침없는 언행을 통해 스스로 맷집을 단련시켰다. 에미넴에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Campaign Speech' 후속작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의 반응과 에미넴의 대응이 기대된다. 원래 남의 싸움 구경이 재밌다.
에미넴이 트럼프를 비판한 첫 래퍼는 아니다. 맥 밀러(Mac Miller)와 티아이(T.I.), 칭기(Chingy)도 트럼프를 비판했고, YG는 아예 디스 곡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밝혔다. 양현석이 사장으로 있는 YG가 아니다. 본명이 키난 잭슨, 2014년 BET 힙합 어워드 선정 최우수 트랙 'My Nigga'을 발표한 아티스트다. 그는 닙시 허슬(Nipsey Hussle)과 함께 'FDT(Fxxx Donald Trump)'라는 곡을 공개했다.
YG & Nipsey Hussle의 'FDT' 뮤직비디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곡은 뮤직비디오 촬영부터 난관이었다. YG는 이달 초에 LA에서 "FDT (Fxxx Donald Trump)"의 뮤직비디오를 촬영중이었다. 문제는 약 100명의 사람들이 촬영을 위해 모였을 때, 경찰이 폭동 진압용 복장으로 나타나면서 발생했다. 경찰은 곧바로 촬영을 중단시키고 소환장을 발부했다. 어떻게 상황을 해결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뮤직비디오는 무사히 공개되었다. 노래의 제목만큼이나 직설적인 가사와 구호들로 가득하다. 물론 진지하게 투표를 독려하는 메시지도 들어있다.
1970년대 힙합 초창기의 음악은 대부분 파티에 기반했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정치적인 메시지를 다루고 있었다. 대체로 인종 차별과 관련한 이야기들이었다. 당시 랩은 흑인들의 팍팍한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1982년 그랜드마스터 플래시와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가 내놓은 곡 'The Message'는 흑인들이 응축했던 분노를 공식 앨범으로 터뜨린 최초의 힙합이 되었다. 그렇게 힙합은 저항정신을 품은 채 2016년의 에미넴과 YG에 다다랐다.
Grandmaster Flash & the Furious Five의 'The Message' 뮤직비디오
"우린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는 거야. 자기들의 인종이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 말야. 우리도 트럼프의 발언에 대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거랑 비슷하게 느끼고 있어. 우리는 그걸 밖으로 꺼내 표현한 것뿐이야." YG가 'FDT'를 발표한 뒤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항정신이 살아있는 멋진 인터뷰다. 신동욱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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