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이 뒤섞인 나선형 계단이 인상 깊은 렘브란트의 그림 '명상하는 철학자'.

- 일반적인 상식을 깬 작품
- 보통의 층계 이미지와 달리
- 상승 아닌 하강 그렸고
- 1층보다 2층이 더 어두워

- 음악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 '부도지' 창세신화와 닮아

아, 이 내부 없는 모순의 나른한 기꺼움, 한없이 가벼운 모노포니의 하늘거리는 선율이여!

휴식 같은 느낌표들의 하강을 우리는 어느 문장으로 받아야 할 것인가? 가리키는 것이 없는 은유처럼, 그늘이 없는 소녀들의 투명함은 형용사의 그물을 꿈결처럼 스르르 빠져나간다. 번 존스(1833~1898)의 '황금 계단'이다.

번 존스는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라파엘전파를 주도했던 로제티와 만남은 옥스퍼드 모범생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화가가 된 그는 라파엘전파의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그 유파의 흐름과는 사뭇 다른 마법적이거나 신화적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곤 한다. 그의 그림 속에는 묘한 모호함이 우리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돌아보면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익숙한 도상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낯설어지는 '황금 계단'을 보라.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소녀들의 하강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번 존스는 '황금 계단'이란 제목을 단테 '신곡'의 천국편 "나는 하늘에서 희끗희끗 번득이는 층계를/하나 보았다. 그것은 햇살에 반짝이는 황금빛을 타고"라는 대목에서 가져왔지만, 이 그림이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역시 모호하다.

층계 이미지의 동역학은 기본적으로 상승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올라가는 사다리다.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하늘 층계는 빛의 세계로 상승을 보여주며, 샤먼의 사다리는 천계로 가는 여행을, 연금술의 층계는 물질의 승화 과정을 의미한다. 이들은 모두 상승의 이미지이다. 그런데 '황금 계단'에서 소녀들은 내려온다.

■어두운 2층과 환한 1층의 의미는?

영국 화가 번 존스(1833~1898) 작품 '황금 계단'. 소녀들의 행렬은 음표의 율동을 보여준다.

18명의 소녀가 내려오는 나선의 계단은 반원을 이루며 화면 전체를 위에서 아래로 지른다. 상상력의 철학자 바슐라르는 몽상 속의 집은 3층 구조를 갖는다고 하였다. 지하실(땅), 1층(지상), 그리고 지붕 밑 다락방(하늘)이다. 3층집은 오롯한 하나의 우주다. 우리가 3층집에 대해 꿈꿀 때 그것은 한 우주를 꿈꾸는 것이다.

다락이 하늘과 새의 세계로 열리는 창을 가진다면 지하는 대지의 내밀한 심연에 닿는 곳이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외부로 열린다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내면으로 침잠한다. 내면의 심연에 이르는 계단은 나선형이라야 제격이다. 마치 조가비나 소라의 은밀한 내부로 들어가듯이. 렘브란트의 '명상하는 철학자'에서 빛과 어둠을 뒤섞으면서 내려오는 나선형 계단이 공간의 깊이를 얼마나 내밀하게 만드는가 보라. 그 공간은 명상에 잠긴 철학자의 심연 같은 내면이다.

'황금 계단'의 모호성은 일반적인 이미지의 동역학과 잘 맞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명상하는 철학자'의 공간과는 달리 여기 하강하는 나선형 계단은 빛으로 충만한 외부이다. 소녀들은 지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2층(다락)에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다. 1층 문 안이 환한 반면 2층 문 안은 오히려 지하 같은 어둠이다. 이 2층 공간은 도대체 뭐 하는 곳일까?

그 정체는 오히려 처마 사이로 열린 하늘과 비둘기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소녀들은 혹시 저 비둘기들의 변신이 아닐까? 부드럽고 가벼워 보이는 소녀들의 의상은 비둘기의 깃털이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둘기가 소녀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비밀스러운 분장실이거나 혹은 어두운 마법의 방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변신한 소녀들이 2층의 어두운 마법의 방에서 환한 빛의 계단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리라.

새의 깃털처럼 소녀들은 가볍다,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계단으로 쏟아지는 빛은 그녀들 표정에 그늘을 만들지 못한다, 아무런 고뇌도 없는 것처럼. 그녀들에게는 내부의 심연이 없다, 김종삼의 시 '북치는 소년'처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저 숱한 우아한 자세와 고요한 움직임, 창백하고 미묘한 표정은 기실 번 존스가 좋아한 안토니아 카아바라는 모델에게서 온 것이다. 하나와 여럿의 모순적인 연결이 이 계단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열여덟 명의 소녀는 각각 하나의 실존적 캐릭터가 아니다. 따라서 실존적 내면이나 그늘이 없다. 그녀들은 서로 이어지면서 패턴을 만들 뿐이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그 패턴은 유려하고 율동적이다. 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핵심은 선이다. 소녀들의 휘감기는 옷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율동적인 선의 아름다움은 촉각적일 정도로 우리에게 부드럽게 와 닿는다. 르네상스 시대, 가장 아름다운 선묘를 창조한 보티첼리를 번 존스는 계승한다. 선의 율동과 리듬 속에 움직이는 소녀들은 제각기 하나씩 악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녀들은 음의 계단(음계)에 있는 음표가 아니겠는가. 음표는 홀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일련의 패턴 속에서 배열되고 이어질 때 그것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숱한 예술가가 모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음악을 꿈꾼다고 하지 않던가. 황금 계단은 음악을 꿈꾼다.

■동아시아 율려의 음계를 느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없이 부드럽고 우아한 여성의 음악, 그것은 문득 신비로운 한 문헌의 구절을 환기한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기술한 '부도지(符都誌)'란 기이한 문헌! 신라 박제상 집안에 전해오던 역사책이라 하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문헌의 진위 여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창조의 상상력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여기에 실린 창세신화는 단언컨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세신화이다.



처음에는 햇볕만이 따뜻하게 내려쪼일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팔려(八呂)의 음(音)만이 하늘에서 들려오니 실달성과 허달성이 모두 이 음에서 나왔으며, 마고대성과 마고 또한 이 음에서 나왔다.… 마고가 궁희와 소희를 낳아 두 딸에게 오음칠조(五音七調)의 음절을 맡아보게 하였다.('부도지')



천상에서 내려오는 음악이 세상을 창조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팔려'는 여덟 개의 '려(呂)'라는 말인데, '려'는 또 무엇인가? 동아시아 악률체계인 율려(律呂)에서 '율'이 남성적 음계라면 '려'는 여성적 음계를 말한다. 여덟 개의 여성적 음(음계)이 세상을 창조하고 최초의 여신 마고를 낳고, 마고는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는다. 남자가 없는, 음악과 여자들의 창세기, 근원적인 모음(母音)의 세계다.

18명 소녀들이 만드는 모호하면서도 투명하고, 우아하면서 나른한 휴식 같은 '팔려'의 선율을 번 존스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강렬한 역동성과 치열한 고뇌의 긴장감이 없다고 투덜거리지 마라. 개체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엮는 남성적 상징과 음계를 요구하지 마라. 여기는 한없이 부드러운 서로의 이어짐과 상징 이전의 고요한 그리움이 흐르는 모음의 음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