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화가 오빈이 그린 '산음도상도권'(부분). 길이 9m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 明代 수석 애호가 미만종 요청으로
- 재야화가 오빈이 그린 사계절 풍경
- 마치 수석들을 겹겹이 펼쳐놓은 듯

- 상층부엔 바위와 구름 몽환적 세계
- 하층부엔 물과 마을의 서정적 시공
- 중간부엔 구멍같은 기이한 여백들
- 그 속에서 환상과 현실이 요동치고
- 우리삶도 경계를 떠돌고 있는지도…

책을 펴고 첫 장을 읽는 순간 몸이 책상과 의자에서 튕겨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는 책이 있다고 한 소설가는 자기 소설의 첫 장에 쓰고 있다(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자기 소설이 그런 책이기를 바라는 듯이 말이다.

그림에도 그런 그림이 있다. 오빈(吳彬, 1591-1636), 이 낯선 이름의 명나라 화가의 '산음도상도권'을 처음 보는 순간, 두려움과 경이로움과 황홀함이 뒤섞이며 모골이 송연했다. 등줄기에 수십만 마리 철새 떼가 일제히 날아오르고, 4계절이 한순간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 수많은 이미지의 문이 닫히면서 동시에 열렸다.

■수석애호가 요청으로 그려

'산음도상도권'(부분).

'산음도상도권'은 9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그 두루마리를 펴면 시간과 공간이 소용돌이치며 바위들이 피어난다. 허공의 꽃처럼. 섬세하면서 아득하고, 험준하면서 웅장하고, 기괴하면서 몽환적이다. 구름을 꿈꾸는 벼랑, 내면의 파도를 드러내는 봉우리, 새처럼 날아오르는 바위들, 꽃처럼 열리는 계곡을 보라.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는 "구름의 몽상가는 구름 낀 하늘에 바위가 몰려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고 하였다. '산음도상도권'에서는 바위가 구름이 되어 몰려있다. 그리고 물결이 되고 꿈결이 된다.

고법(古法)에도 구애되지 않고, 옛 대가의 전범들도 뛰어넘어버린 절정의 상상력에 돋보기를 들고 해삭준이니, 우모준이니, 피마준이니 하는 준법을 찾는 것은 얼마나 좀스러운 일인가. 이 경이로운 작품은, 당시 화단의 총수였던 동기창에 의한 당파적 분류, 남종화니 북종화니 하는 분류법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산과 바위와 계곡이 스스로 몽상하고 춤추면서 이미지를 생성할 뿐이다. 그리하여 산과 바위는 쉴 새 없이 변전하고 흐른다. 산의 몽상이 열어놓는 빈터에 비로소 사람의 마을이 허락된다. 그 몽상 속으로 우리의 삶도 흘러가는 것이리라.

두루마리에 있는 발문에는 이 기이한 그림이 당시 최고 서예가 미만종(米萬鍾, 1570-1628)의 요청으로 그려졌음을 밝힌다. 미만종은 수석(水石)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그의 집에는 신비롭고 기기묘묘한 수석이 가득 차 있었으며, 오빈은 그 놀라운 수석의 천태만상을 일별해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수석들과 함께 첩첩 산중으로, 구름으로, 바다로 흘러가며 몽상했으리라. 거대한 괴석도(怪石圖) 같은 '산음도상도권'의 추상적인 미는 이러한 수석을 통한 몽상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산림에 은거한 재야 화가

우리에게도 돌을 몽상했던 시인이 있다. 시인 박두진, 그는 만년에 수석에 심취했고 그 돌과 함께한 이미지 여행을 시집 '수석열전(水石列傳)'에 담았다. 수석열전 68번째 시 '유전도(流轉圖)'는 견고한 돌 속에서 있고 없음 사이를 흐르는 소용돌이를 본다.



난 것은 모두 죽고, 죽은 것에서 다시 나,

소용돌이 소용돌이

저절로의 흐름,

침묵에서 침묵으로의 영원히 있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거기 있고 없는

해와 달, 하늘 땅이 꼬리 이어 도는

천의, 억의 영겁 천지 바람 불고 있다.



두루마리 '산음도상도권'은 2중의 성부를 가진 다성(多聲) 음악처럼 흐른다. 화면 위까지 꽉 찬 산봉우리들의 리듬과 흐름이 그 하나다. 산봉우리의 흐름은 고음부를 이루며, 장엄하면서도 환상적인 선율이 된다. 또 하나의 흐름은 화면 하단, 물과 숲과 사람의 마을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선율이 저음부가 되어 흐른다. 그리하여 다성의 흐름이 서로 역동적인 대위법을 이루며 무한을 향하여 이어지고 이어지며 전개된다.

고음부의 산과 바위와 구름의 세계가 춤추고 유동하는 몽환적 시공을 펼친다면, 세심하게 공들여 그려진 나무와 집들의 세상인 저음부는 현실적 시공을 연다. 진(眞)과 환(幻)이 서로를 밀어내기도 하고 서로 껴안기도 한다. 그리고 그 양 경계 가운데 기이한 것이 떠돈다.

보통 산수화에서 여백은 근경과 중경 사이, 중경과 원경 사이를 운무(雲霧)의 띠처럼 흐르다가 원경에서 아득하게 무(無)의 허공으로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산음도상도권'에서는 봉우리들이 화면 끝에 닿으면서 이어지기 때문에 산 너머 아득한 여백을 별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여백의 영역은 산의 내부, 봉우리와 마을의 사이를 떠돌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다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골짜기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운무라기보다 풍경 군데군데에 발생한 돌연한 구멍 같지 않은가. 기이한 여백이다.

오빈은 산림에 은거한 재야 화가였다. 그 솜씨가 알려지자 황제(신종)의 부름을 받고 공부(工部)를 관장하는 주사(중서사인) 직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는 정치판은 처음부터 그의 자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잘못된 것을 참지 못하는 오빈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환관 위충현을 비판하고 그 일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만다.

출옥 뒤 본래 그의 자리인 산림으로 돌아가 불교 관련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마친다. 불교는 그의 회화적 상상력의 바탕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산음도상도권' 역시 그의 불교적 세계관이 만화경처럼 펼쳐진 풍경 아니었을까?

■조지훈 '돌의 미학' 떠올려 본다

고음부의 산봉우리와 저음부에 위치한 사람의 마을, 환(幻)과 진(眞) 사이를 떠도는 여백, 그 기이한 구멍들은 우리 삶의 이미지들 사이에 문득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공(空)이 아닐까. '반야심경'의 요체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있음이 곧 없음)"의 '공'에 있다. '공'은 '색'과 대립하는 어떤 영역이라기보다 색과 공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산음도상도권'의 떠도는 구멍들은 진과 환의 경계를 흐른다. 그리하여 몽환과 현실의 경계가 요동친다. 무엇이 실상이고, 무엇이 환상인가? 모두가 실상이고, 모두가 몽환인가? 바위와 산과 폭포와 마을이 그 물음표 사이를 흐르고 떠돈다. 우리들 삶도 그 사이를 떠돈다.

우리는 아직 돌의 몽상을 끝내지 않았다. 가장 무심한 무정물(無情物)인 돌에서 우주적 생명력의 응축을 느낄 때 돌의 몽상은 비로소 절정에 이른다.

영국 소설가 로렌스는 말했다. "인간이 왜 돌을 사랑하는지 아주 잘 안다. 그것은 돌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이전 시대의 강력한 대지의 신비로운 힘의 구현이다."('캥거루')

그러나 로렌스의 말보다는 아무래도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에 이끼 마른 수석(瘦石)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돌의 미학')고 한 시인 조지훈의 말이 더 가슴에 닿는다.

'산음도상도권'은 진과 환 사이를 춤추는 돌의 몽상이며, 돌의 묘경을 통해 '동양의 진수'를 맛보게 하는 일대 향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