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원·명나라 교체기 혼란의 시대
- 홀연히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간 왕몽
- 은거생활 풍경을 화폭에 옮긴 그림

- 깊은 골짜기 초옥·초당 속의 여인
- 주름을 겹쳐 그려낸 계곡과 동굴
- 이상적인 은둔지인 모태의 구조

- 세상 나와 출사후 이내 숨진 감옥은
- 그가 찾아낸 마지막 은신처였을지…

모든 것은 주름을 가지고 있다.

삶도 주름이고, 세계도 주름이다. 주름(준·皴)들, 주름은 안으로 접어 넣고 응축시키면서도 그 접힘 때문에 확산하려는 힘의 긴장을 가진다. 겹겹의 주름이 우리 시선을 골짜기 속으로 계속 접어 넣으면서도 화면 밖으로 넘쳐흐르려고 하는, 미로 같이 얽힌 불안한 힘으로 진동하고 있다.

그 주름의 진동을 저마다 굽이진 생의 주름으로 감지했다면, 우리는 원대 4대가 중 한 사람, 중국회화사에서 가장 탁월한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는 왕몽(王蒙·1308~1385)의 황홀한 명품 '구구임옥도(具區林屋圖)' 속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동시대 라이벌 예찬이 성긴[疏] 풍경의 끝을 보여주었다면 왕몽은 빽빽함[密]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왕몽은 한 시대 예림(藝林)의 총수였던 조맹부의 외손이다. 어릴 때부터 외조부에게 그림을 배웠고 대대로 관직에 출사한 외가 전통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왕몽의 마음에는 언제부턴가 산수 속의 은거생활에 대한 선망이 싹텄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구름을 품고 다니는 도교인사들과 교류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었을까? 왕몽이 관직을 맡은 지 얼마 있지 않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원나라 말기, 이 붉은 두건을 두른 도적의 봉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하자 왕몽은 홀연히 관직을 버리고 항주 북쪽 황학산(黃鶴山)으로, 이후 20여 년 계속될 은거 생활에 들어간다.

왕몽은 도연명을 꿈꾸었을까? "자,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황폐하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귀거래사) '구구임옥도'는 그 은거 생활의 한 장면이다.

■해삭준·우모준의 미세한 진동

화가의 프레임은 자못 유별나다. 화가의 프레임에 걸린 풍경은 산의 윗면이 화면에서 모두 잘려 나가버렸다. 일반적인 산수화에서 산과 산 너머로 펼쳐지는 아득하고 광활한 풍경과 달리 여기서는 산 전체 형세를 볼 수가 없다. 산 형상에는 여백도 거의 없어 화제 '구구임옥(具區林屋)'이 있는 오른쪽 상단의 모퉁이가 겨우 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미궁에 숨통을 틔우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선은 차단된 채 산의 내부, 끝없이 접혀 들어가는 주름의 골짜기로만 향하게 된다.

겹겹의 주름은 내부에 화가 특유의 해삭준(산의 주름을 새끼줄 풀어진 것처럼 그리는 준법)과 우모준(소털처럼 그리는 준법)으로 미세 진동을 만들면서 복잡성을 증가시킨다. 계곡도 주름의 요동이요, 계곡물도 물결의 진동이다. 골짜기는 온통 주름이 발생시키는 진동으로 메아리친다. 주름과 주름이, 진동과 진동이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면서 생성하는 메아리에는 어떤 내밀한 전언이 담겨 있을까?

골짜기 입구의 구멍 난 괴석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곳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표지인 듯하다. 계곡 입구의 조각배와 오른쪽 동굴 입구에 있는 두 동자는 화가의 백일몽이 창조한 선계를 안내하는 선동(仙童)이리라. 비밀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왼쪽 길은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고, 오른쪽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계곡의 초옥 안에 여성이

격렬한 주름의 진동을 느끼면서 붉은 꽃들이 흐드러진 골짜기 속으로 완보하며 올라가 보자. 복사꽃일까? 꽃들은 주름이 뿜어내는, 제어되지 못한 힘처럼 골짜기를 여기저기 물 들인다. 그리하여 반복적인 주름의 기하학과 디자인에 욕망과 표정을 부여한다.

골짜기에는 한 채 2층 초옥과 두 채의 초당이 있다. 첫 번째 초당에는 은자(隱者)가 서책을 들고 있다. 그의 자화상일까 하는 의문을 부풀려 보기도 전에 벼랑 위 두 번째 초당의 인물이 여자라는 것이 우리를 문득 의아스럽게 한다. 그리고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 2층 초옥의 주인공도 여인이다. 이미지는 속삭인다, 골짜기 은밀한 내부의 주연은 여성적인 그 무엇임을. 은거지 풍경의 주연이 여자인 것은 산수화에서 희귀한 경우다.

그러고 보면 그 안에서 냇물이 흐르는 오른쪽 동굴의 형상도 수상쩍다. 여성의 생식기와 흡사하지 않은가? 계곡의 비밀, 가장 깊은 자리의 초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드러난 왼쪽 길보다 마땅히 이 동굴의 숨겨진 길을 지나야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초옥은 자궁이고 주름으로 가득 찬 이 골짜기는 어머니, 모태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모태는 실상 모든 은거지의 원형이다. 모태적인 공간이야말로 삶에서 다친 우리 마음을 마지막으로 치유할 수 있는 곳이다. 도연명의 무릉도원(도화원기)에 이르는 길 역시 그러하다. 복사꽃 흐르는 시내를 따라가다 만나는 동굴, 그 동굴을 지나 나타나는 은밀한 마을은 어김없이 모태의 구조다. 그곳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이상적인 은둔지다.

모태, 어머니로의 회귀, 그것에 대해 심리학에서는 흔히 '퇴행'이라는 부정적 딱지를 붙인다. 과연 그러한가? 이러한 명명법은 파괴적인 경쟁과 냉혹한 승리의 가치를 찬미하는, 아니면 최소한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세계의 모습을 전제하는 가부장적 편견에 사로잡힌 명명법은 혹시 아닌가? 칼 융의 생각은 좀 달랐다. "퇴행은 결코 '어머니'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를 넘어서, 말하자면 출생 이전의 '영원히-여성적인 것', 즉 원형적 가능성들의 근원적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은둔의 선망과 세속의 욕망

'원형적 가능성들의 근원적 세계'를 동양의 현자 노자는 죽지 않는 '골짜기의 신(谷神)'이라 했다. '골짜기의 신'은 영원히-여성적인 것이요, 우주 생명의 도(道)이다. 세속의 격랑에서 벗어나려 했던 왕몽은 자기도 모르게 원형적인 모태의 공간, '골짜기의 신'을 디자인하려 했던 것이었을까? 어디선가 '파우스트'의 마지막 합창이 들려오는 듯하다.



영원한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

겹겹 주름 속으로 은거한 왕몽은, 그러나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예찬이 도달한 '텅 빔'에는 이르지 못했다. 완전한 은거, 궁극의 은둔은 무한한 자유이면서 무한한 쓸쓸함이며, 무한한 여백이면서 힘인 '무(無)'에 이르는 것이다. 무에 이르지 못한 왕몽의 주름은 접힘의 응축만큼이나 섣불리 확산하려는 불안한 긴장으로 떤다. 왕몽의 주름은 은둔의 선망이면서 세상에 대한 욕망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구구임옥도'의 주름은 내밀함으로 접혀들면서도 이토록 화면을 넘어서려는 진동의 격렬함을 품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그린 텅 빈 화면의 그림처럼 예찬은 한 척 거룻배로 강을 떠돌다 사라졌다. 그러나 왕몽은 긴 은둔 끝에 막 새로 건국된 제국 명나라에 출사한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이 위대한 화가는 모반 사건에 연루돼 어둡고 차디찬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감옥이 그의 주름과 진동이 찾아낸 마지막 은신처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