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왼쪽 위부터 변대성 현민호 남상준. 스톤드 제공

나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다수 어른은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잘 익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보다는 일단 고개부터 숙이게 하는 데 더 열심이라 겸손을 강요할 때 남발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작, 익어서 고개 숙이는 법쯤은 알고도 남아야 할 사람들은 약자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무례한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군대에서, 후미진 여관이나 오피스텔에서, 매일매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으슥한 동네 골목이나 야산 등지에서 출구 없는 폭력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끔찍한 일에 휘말리고 있다. '어린이가 미래'라는 수사(修辭)가 공허하기만 한, 적나라한 약육강식의 시절이다.

■어린이가 빨리 늙게 하는 병든 사회

요즘 어린이들이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경제 환경과 문화적 수혜 속에서 자란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겼으며 체격이 좋고 똑똑하며 감성도 풍부해 보인다. 정보 검색이나 외국어 능력이 좋고,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분위기 탓에 부모의 관심도 충분히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얼굴이 밝지 않다.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지난 7년간 강의실에서 마주친 대부분 학생이 스스로를 잉여라 부르기도 하고 '야성'이나 '청춘', '지성인'이나 '자기 주도적 삶' 같은 말을 들으면 그저 배시시 웃어넘길 뿐이었다.

나는 이들의 양순함(?)이 자주 불쾌했다. 익지도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애잔해지는 걸 넘어 화가 날 때도 있다. 아마도 어린 나이부터 '즐기기'보다는 '배워야'하는 환경에 훨씬 많이 노출되고, 성장과 성숙을 위해 충분히 게으를 시간을 받은 적 없으며, 언제나 등수나 시험 점수 혹은 번호 같은 '숫자'로만 제 존재가 파악되는 질 낮은 경험을 자주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어린이들을 조로(早老)하도록 유도하는데, 그래야만 책임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하고, 한 번의 실수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가혹한 경험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좋은 학교나 직장을 자기 자신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작은 사기에도 취약할 만큼 새가슴으로 만들어놓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린이들은, 더 많은 실수와 실패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노출될 수 있어야 한다. 실패는 인생의 아주 짧은 시기에만 주어진 중요한 권리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청년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이 실패의 권리를 오래오래 충분히 누리고 나아가 즐긴다.

■활짝 웃는 얼굴로 망치를 들어라

역사상 가장 많은 오해와 오독을 낳은 철학자는 단연 니체일 것이다. 도발적이고도 대담한 사상을 통해 종종 무시무시한 정신병자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사실 니체만큼 유쾌하고 자유분방한 철학자도 없었다. '이 사람을 보라'와 같은 책 속의, '나는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는가?'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와 같은 제목만 봐도 그가 얼마나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음흉한 겸손을 택하기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순간순간 펄떡이는 이 생(生)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긍정한 철학자였다. 그가 쓴 책 '우상의 황혼'의 부제가 '망치로 철학 하는 법'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생의 의지를 막을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것은 이 세계에 없다'고 외치며 망치를 휘둘렀던 철학자다. 그에게는 도덕도, 종교도, 그 무엇도 살아있음 자체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긍정적 니힐리즘'이랄 수 있는 그의 철학은, 그가 영향을 많이 받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이며 수동적인 니힐리즘과는 수준이 달랐다.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없으므로 이 세상은 그저 혐오의 대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쇼펜하우어와 달리 이 병든 염세주의에 활력을 불어넣어 생의 소중함과 긍정성을 극단까지 밀어 올린 니체를 떠올려보면, 그의 거침없는 무한긍정 태도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기존 질서와 세계에 동의할 수 없다면 고개를 숙이고 양순하게 따르기보다 저마다 자신의 망치를 준비할 일이다.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망치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니체의 표현을 따르자면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 전쟁'을 준비할 일이다. 파괴는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의 당연함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수다한 윤리와 당위, 법칙과 제도가 실제로는 실체가 없으며 나아가 하나의 환각일 수 있다는 의심을 통해 구경꾼이 되기를 거부하고 이 세계에 직접 참여한다는 기분,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피폐한 세계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외면하지 않고 마침내 꿋꿋이 익은 벼가 될 수 있도록 우리 어린이들이 꼭 거쳐야 할 첫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부산 펑크의 도발적 에너지, '스톤드'

펑크 음악은 허무주의를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도 결코 음울하거나 내면으로 침잠하지 않고 건강한 무례함과 거칠 것 없는 파괴의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종종 니체의 긍정적 니힐리즘을 떠올리게 된다. 런케럿, 게토밤즈 등 이전 밴드들에서도 상당한 성취를 보여준 바 있는 부산의 펑크밴드 '스톤드'(STONED)는 지난해 발매한 그들의 첫 EP '붉은 녀석'의 첫 곡, '야 임마 너'에서 기타라는 망치를 들고 우리에게 외친다. "야 임마 너!/ 지금 여기 서 있는 난 무얼 하고 있나/ 거기 기대 서 있는 너/ 야 임마 너!/ 눈치 볼 필요 고민할 필요/ 닫힌 너의 마음/ 부어라 마셔라 자 다 함께 외치자"

장현정

나는 학생이나 어린이에게 겸손하라고 말할 때 종종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진다. 어린이들은 본래 자랑하길 좋아하는 존재이고 그러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고 한 걸음 더 성장할 힘을 얻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늘 상대를 찾지 못해 안달인데 그럴 때 마음껏 자랑해보라며 흐뭇하게 지켜봐 주는 건 이쪽에서도 기분 좋고 힘 나는 일 아닌가. 아직 익지 않아 온몸으로 저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매일매일 자라야 할 아이들이 고개 숙이고 있는 풍경은 참담하다. 더 큰 고함소리와 더 억센 악다구니가 필요한 시절이다. 예절? 일일이 그런 걸 차리다가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을 것이다.


# '스톤드'(STONED)

'스톤드'(STONED)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소재로 현대 한국 사회 청춘의 솔직한 감정을 특유의 부산 사투리식 가사와 직설적인 펑크 사운드로 들려준다. '스톤드'는 2011년 1월, 현민호(기타·보컬) 변대성(베이스·보컬) 남상준(드럼)의 3인조로 결성된 부산의 펑크밴드다. 그전부터 런캐럿, 게토밤즈 등 부산을 대표하는 펑크밴드에서 활동해 온 멤버들이 모였다. 그만큼 경력이 만만찮다. '스톤드'는 결성 이후 부산국제록페스티벌, 부산국제영화제 야외특설무대, 부산인디록페스티벌 등에 참여했고, 2013년 8월 EP '붉은 녀석'을 발매했다. 지난해 발매된 부산 밴드들의 컴필레이션 앨범 '특별시 부산'과 '동백락원'에도 참여했다.

사회학자·호밀밭 출판사 대표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