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휴가 시즌이다. 휴가나 여행 같은 말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사실이다. 대부분 우리 일상은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것이며 지금과 같은 일상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지금보다는 더 나으리란 기대로 멸시의 대상이 될 때도 잦다. 그런데 정말로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나면 무언가 근사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걸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실제 문제는 일상이 아니라, 경주마처럼 앞만 바라보며 질주하고 있는 우리의 멍청함과 욕심 때문이니까 말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들,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순간순간이 나에겐 힘들어, 난 벗어나고 싶어"라고 노래하던 듀스의 1집 앨범을 귀에 꽂고 다니던 10대 후반에는 나에게도 일상이란 그저 따분한 것, 벗어나야만 비로소 근사해질 수 있는 대상이었다. 몇 나라를 구경했고, 여름마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달하며 낯선 도시와 섬들을 떠돌았다. 끊임없이 빠져나가고 싶었고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근사해 보였다. 그럼에도 일상의 팍팍함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도대체가 해갈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의 일이 된 소비와 여가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소외'다. 인간의 존재 의미에 관한 철학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된 개념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유일무이한 의미 있는 존재임을 어디에서 확인받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다름 아닌 '노동'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100년 안팎으로 주어졌으니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인 셈인데, 인간은 피처럼 소중한 이 시간을 한 방울 한 방울 쏟아가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 과정과 결과물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와 직접 소통하는 숭고한 경험을 하고 그 순간 의미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실감한다. 그러니 이처럼 중요한 행위인 노동으로부터 소외는 단순히 노동으로부터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 이 세계로부터 '왕따'되는 비참한 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자신만의 소중한 이야기나 정체성 따위는 모조리 제거된 채 한낱 월급 얼마짜리라는 가격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가격표를 가슴에 단 창백한 상품이거나 쓸모없는 쓰레기, 둘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인데 이 얼마나 외로운 시대인가. 마르크스가 그토록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는 여행이나 휴식도 더는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환기하여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매듭이라기보다는 더 잘 일하기 위해 잠깐 복용하는 진통제나 마취제처럼 기능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떠남이 사실은 또 하나의 일일 뿐이다.

■일상,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중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취제나 진통제와 같은 잠깐의 가짜(pseudo) 휴식이 아니다. 낯선 삶의 방식, 낯선 체험을 통해 변해야 하는 것은 정작 나였다. 나의 노동이며 나아가 나의 일상이었다. 기존의 나를 낯설게 바라보고, 기존의 습관을 바꾸어보고, 익숙한 말들을 환기하기 위해 시집을 꺼내 읽어보는 등의 건강한 단절과 휴식은 꼭 공간을 이동해야만 가능한 떠남이 아니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함께하지 못했던 가족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하여 나의 일상 자체를 소박하면서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은 돈이 얼마나 드는지, 광고나 SNS에서 뭐라고 떠드는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들이었다.

일상생활과 일상성에 관해 선구적이면서도 중요한 저작들을 남긴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를 '소비조작의 관료사회'라고 명명하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 소외'는 오로지 영구한 문화혁명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광고야말로 우리 일상을 병들게 하는 주된 질병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던 유명한 광고 카피의 뒤에 '푹 쉬다 와서 더 열심히 일하라, 그리고 더 많이 써라!'는 명제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조작된 여행은 열심히 일한 당신을, 거기 가서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들 것이다. 돈도 많이 써야 하지만 무엇보다 강박적 여행은 정신을 쉬게 놔두지 않는다.

일상이 고달플수록 스펙터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 남의 얘기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성의 회복'에 있다. 일상성은 완강하고도 보수적이지만 바로 그 속에서 싹트는 창의성과 상상력이야말로 건강하고도 구체적인 쾌락이며 기쁨이다.

■'에브리 싱글벙글 데이'의 여유

1994년 부산에서 결성한 뒤 1999년 데뷔 앨범 발매와 함께 서울로 터전을 옮긴 록밴드 '에브리 싱글 데이'는 인디계의 큰 형님이자 모던록 1세대 등으로 불린다. 최근에는 드라마 '파스타' '골든타임' '청담동 앨리스' '마이프린세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미스 코리아' '갑동이'까지 맡은 음악마다 호평을 얻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드라마 음악가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들은 일상에서 느껴지는 담담하면서도 흐뭇한 사연들을, 끝끝내 놓지 않는 긍정적인 기운과 희망의 에너지들로 노래한다. 그런지, 펑크, 하드코어 등 음악이 대세를 이루던 1990년대 말 홍대 앞에서도 주변의 유행이나 시류와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속도와 리듬으로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줄기차게 2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이들은 부산 인디계의 맏형임을 넘어 마침내 한국의 대표적인 록밴드로 성장했다.

밴드 이름처럼 매일매일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알며 담담하게 걸어온 이들의 음악은 그 오랜 시간과 연륜으로 이제는 사운드의 담담함, 악기 간 톤의 밸런스 등 그야말로 단단한 사운드를 구축했다. 이처럼 긴 세월을 담담하면서도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잃지 않고 버티기란, 한국의 록음악계를 어느 정도 아는 내 입장에서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개인적으로도 멤버들과 친하게 지내는 나는, 특별히 이들을 '에부리 싱글벙글 데이 행님들'이라고 부르는데 딱 그 말처럼 이들은 특별한 일 없어도 매일 매일을 싱글벙글 산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계속 찾게 되는 한여름 시원한 평양냉면의 그 슴슴한 맛처럼 음악 자체를 자신들의 일상으로 품어 안고 또박또박 한 걸음씩 걸어온 이들의 앞날을 더욱 기대하고 있다.


# 에브리 싱글 데이

- 하루하루 담담한 희망 노래…영화·드라마 음악감독 활약

'에브리 싱글 데이'(Every Single Day·사진)는 1994년 부산에서 결성된 '웨스턴'을 전신으로 한 3인조 록밴드다. 초창기부터 호흡을 맞추며 밴드를 이끌고 있는 문성남(보컬&베이스)과 정재우(기타, 프로그래밍)를 축으로 김효영(드럼)이 함께하고 있다. 1997년 제1회 부산MBC 록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2년 뒤인 1999년 첫 앨범 'Broken Street'를 발매하며 데뷔했고 이후 2011년 'Moment'까지 모두 5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했다.

에브리 싱글 데이는 영화와 드라마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며 유명세를 얻고 있다. 특히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삽입된 '에코'는 그들 특유의 청량감이 느껴지는 곡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지난해 9월에는 달샤벳의 우희와 함께 한 신곡 '낮잠'이 포함된 EP '구름다리'를 발매했다.

지난달 28일 대만에서 열린 중화권 최고 권위의 음악 시상식과 국제 음악페스티벌에 국내 창작음악씬 아티스트로는 최초이자 한국 가수로는 유일하게 초청받아 현지 매체들과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다음 달 8~10일 사상 삼락생태공원에서 열리는 부산국제록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다.

사회학자·호밀밭 출판사 대표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