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이'와 '권력'의 이미지 각인

- 백인·유럽문화 가치기준 삼아

- 흑인 개조·맹목적 숭배 시도한

- '하얀 가면' 신흑인 운동처럼

- 아직 우리의 일상적 말과 삶에

- '복제된 인종주의' 남아 있어

 

- 침묵·복종 대신 강한 '말대꾸'로

- 허상 깨고 진정한 자아 찾아야

영문학자 제임스 스니드는 백인·유럽 문화가 항상 명료한 목표를 가지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보와 통제의 환상을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직선적이고 규범적이며 강하다. 백인·유럽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현대의 우리는 늘 분명한 시작과 종결 그리고 체계와 질서에 애착을 갖고, 많은 경우 '~해(돼)야 한다'에 중독된다.

이에 반해 미국 흑인 문화는 순환적이며 즉흥적이고 유연하다.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다. 목표가 있더라도 그를 향해 맹목적으로 진보하지 않고 언제나 목표를 유보한다. 마치 "'중단(cut)'하고 시작으로 돌아간다"는 재즈 패턴처럼, 그 체계 내부에 여유 공간을 만들고 우연과 뒤틀림을 반복한다. 그리고 여유 공간은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대화 장소가 된다.

1920년대 미국의 고무적인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는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였다. 노예에서 해방된 남부 흑인들이 생존을 위해 모여든 제2의 고향, 뉴욕의 할렘에서 일어난 흑인 문화의 발흥 혹은 재발견 운동이었다. 재즈가 유행했고, 다양한 문학 작품이 쏟아졌다. 이 시기 혜성처럼 나타난 여성 작가가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이었다. 그녀가 선배 비평가들의 총애를 받고 활동하던 당시, 흑인사회를 지배했던 신흑인(New Negro) 운동은 흑인도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흑인사회의 문명화와 진보를 증명하고, 백인의 가치 기준에 맞춰 흑인을 개조함으로써 지위 향상을 꾀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모방과 명령

허스턴은 1937년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Their Eyes Were Watching God)를 발표한 뒤, 그녀를 총애했던 선배들로부터 비난의 십자포화를 받고 문단에서 종적을 감춘다. 신흑인 운동의 멋진 비전이 결국 성공한 소수 엘리트의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적 관점을 드러냈던 까닭이다. 근대화를 시도하는 새로운 흑인 공동체 질서의 맹목성과 가학성 앞에서, 그녀는 함께 가던 길을 중단하고 원초적인 흑인 민중의 문화 현장으로 되돌아가 그 인간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소설은 흑인 엘리트가 백인의 말과 앎과 삶을 흑인사회에 번역·이식함으로써 왜곡되고 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성찰한다. 16세 여성 주인공 재니(Janny)의 꿈 많은 삶은 결혼에서부터 무참하게 망가진다. 중년에 이르기까지 검은 피부를 가진 두 명의 지배자(남편)는 다른 인생을 시작하는 문이 아니라 벽이었다. 각각 노예 주인과 백인 엘리트를 복제하는 그들의 말과 앎과 삶은 백인 지배자의 그것이었다. 작품 전반부는 '한 인간이 어떻게 여성으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널 필요로 하는 자리면 어디든 그곳이 네 자리야." 쟁기질하고, 씨감자 수확하고, 자기가 원할 때 언제든 섹스를 수용하는 여성 노예를 원하는, 자수성가한 농장주인 첫 남편 로건의 지론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도시, 이튼빌을 건설하는 흑인 지도자이자 두 번째 남편 조디는 "여성과 아이들과 소와 닭은 대신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 그래, 그것들은 결코 스스로 생각 못 하지"라면서 누구든 언제나 말문을 닫고 순응하도록 만든다. 둘 다 근대문명의 중심 가치인 '이익'을 위해 내달리고 흑인 공동체 개조의 모범으로 성공한 흑인들이다.

■강요된 침묵에서 '말대꾸하기'로

흑인 지도자들은 백인=진보의 모범을 구현하기 위해 무지하고 퇴행적인 무리를 개조하는 사명감을 가진다. 이들의 한결같은 화법은 "깜둥이 같은 행동, 그만둬!"라는 식이다. 프란츠 파농은 이를 '검은 피부, 하얀 가면'들의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경멸적인 세계관"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놈들은 게을러서 어쩔 수 없어. 두들겨 패야 해!"라는 식의 화법과 같다.

소설 후반부는 '어떻게 한 여성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지'가 그려진다. 그 문턱은 '말대꾸하기(talking back)'로, 다시 말해 '큰 목소리'(big voice)의 복제가 아닌 자기 말의 문을 열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재니는 강요된 오랜 침묵을 깨고 대화의 문을 만들기 위해 벽을 두드린다. "들어봐요, 조디. 바깥 거리를 바삐 돌아다니는 그 조디가 당신 자신이 아니에요. 그 조디가 죽고 나면, 당신은 뭘 할 건가요?"라고 묻고는 "당신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에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그 조디는 죽어야 해요. 조디는 자기 이외에 누구도 위안해주지 않았지요. 그저 자기 큰 목소리를 듣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지요."

재니와 타인들을 가혹하게 대했지만, 성공을 위해 자기 자신 또한 학대했던 조디는 충격으로 몸져눕고 앓다가, 끝내 '자기 허영'을 안고 진짜로 숨을 거둔다. 오로지 명령하는 기계였던 조디는 벽이 허물어지고 대화의 문이 열리자, 다시 말해 자기 허상이 깨지고 진정한 자기 모습 앞에서, 그만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만약 조디의 죽음이 문학적 상징이라면, 스스로 다른 삶의 문이 되는 세 번째 남편 티 케이크는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 둘은 함께 너와 나의 '작은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복제된 인종주의의 그늘

두 남편 로건과 조디는 백인 서구 문화의 인종주의를 복제하고 있다. 인종주의의 핵심 구성 요소는 '차이'와 '권력'이다. 기원과 혈통과 순수성에 집착하는 근대문명은 서구·백인·기독교·남성·이성애·엘리트(지식+자본)를 우등의 이미지로, 비서구·유색인·비기독교·여성·동성애·대중을 열등의 이미지로 각인해왔다.

실상 이런 상반된 이미지의 표출은 '공식적'으로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요즘 회자하는 'A급', 'B급' 등 분류 방식이나 이주 노동자와 다문화 가족에 관한 편견에서부터 자기 동족을 천시하는 '바나나' 지도자들, 자본가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노동자, 엘리트를 숭배하는 대중까지 곳곳에 인종주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일상적인 나의, 아니 나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과 앎과 삶에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눌러 차별하려는 시도가 있지 않은지 돌이켜보자. 나는 정말 나일 수 있을까? 

# 민중 삶·정신 올곧게 대변, 길들여지지 않은 창조정신

■ 흑인 여성문학 대모, 허스턴

조라 닐 허스턴(사진)의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Their Eyes Were Watching God)는 동시대 미국 사회의 급진적 분위기와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최고조에 이른 흑인문학의 저항적 전통 속에서, 비평가들에 의해 반문명적인 흑인 민중의 '천박한' 문화를 찬양한 작품으로 격하됐다. 이 때문에 흑인문학계에서 완벽하게 그 이름조차 사라졌던 허스턴은 1970년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 등 여성 작가들에 의해 재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정치적 대의나 흑인운동의 의무에 맹목적으로 휩쓸리기를 거부하는 한편, 당대 민중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대변했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길들여지지 않고 창조적인 정신으로 종족의 혼을 만나 소통하는 새로운 공간을 연 작품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여성주의, 인종주의, 근대성 비판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는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2005년 미국 타임지가 꼽은 '1920년 이후 영어로 출판된 100대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재니와 조디가 등장한 무대인 플로리다주의 이튼빌(Eatonville)은 실제 1887년 8월 15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흑인만으로 구성된 마을이며, 허스턴은 그곳 출신이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