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크루 '아우라지'와 힙합 레이블 '얼라이브 뮤직'(www.alivemusic.kr) 소속 아티스트들이 함께 공연을 하고 있다. 얼라이브 뮤직 제공

- 효율성 가치 아래 복종 강요
- 세상을 지배하는 '셀프 문화'
- 개혁·검증조차 '스스로' 남발
- 독재만큼 무섭고 위험한 발상

- 다름과 고유성 인정하면서도
- 공동작업 위해 돕고 협력하는
- 힙합 크루 '아우라지' 모습처럼
- 서로에 대한 신뢰 회복해야

1991년, 내가 살던 광안리 해변과 남천동 골목에 KFC, 파파이스,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점들이 여기저기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몹시 즐거웠다. 아무나 외국에 나갈 수 없었던 시절, 영화에서나 보던 미국 문화를 집 앞에서 현지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건 '셀프 문화'였다. 몸은 다 컸지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어린애 취급을 받아 억울했던 나는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스스로 주문하고 음식을 가져다 먹고, 또 다 먹고 난 뒤 익숙한 몸짓으로 치우다 보면 어쩐지 비로소 자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게 된 것 같아 묘한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맥도날드, 현대 사회의 또 다른 이름

어렸던 나는, 그것이 '효율성'이란 가치 아래 세계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첨병들에 의한 '부드러운 통제'의 기술임을 알 리 없었다. 컬러TV의 감각적인 광고들은 어떤 금기든 자유롭게 넘나들며 내 안의 욕망을 자극했고 무거운 표정이나 위압적인 명령 대신, 세련된 분위기로 살살 달래고 어르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흔쾌히 지갑을 열고 투표장으로 향하도록 유도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를 참고하자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이득을 얻으려는 이른바 효율성의 원리가 사람을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복종'하도록 만들며 모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셈이었다.

특히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맥도날화(McDonald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이 같은 현대 사회의 실체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가장 큰 성과를 가장 빠르게 달성하려는 맥도날드의 효율성 중심 경영원리가 현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역설적으로 사회가 피폐해지고 현대인의 일상생활도 망가지는 이른바 '합리성의 비합리성'을 경고한다.

나는 이 '맥도날드화'의 확장에 '셀프문화'라는 게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교양도, 문화도 아닌 그저 맥도날드라는 기업이 정해놓은 룰(rule)에 불과한 원리에 양순하게 따르고, 그저 따르는 걸 넘어 이 셀프문화야말로 매우 문화적이고 세련된 것이라 착각하며 어떻게 주문하고 행동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친구들을 촌놈이라고 놀리기까지 했다는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모든 사회적 배경이나 조건들은 똑 떨어뜨려 놓은 채 오롯이 한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를 그 자신의 능력 탓으로만 돌리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

■물은 셀프? 오케이, 물만 셀프로!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저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형 인간'같은 게 되겠다며 스스로를 다그친 지도 꽤 됐다. '자기 계발' '자기관리' 같은 말이 유행한 지도 오래됐고 동네 작은 분식집에서도 시대의 상징처럼 '물은 셀프'라고 크게 붙여진 문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어떤 대통령은 자신에게 셀프 훈장을 주는가 하면, 셀프 개혁, 셀프 검증처럼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에조차 셀프라는 말이 달려 떠돌고 있으니, 이쯤 되면 질병의 수준이다.

'개인(셀프)'은 근대의 상징이자 진보의 기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가치이고 하나의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숙하지 못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책임진다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선 독재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서운 발상이기도 하다. 개인주의가 얼마나 성숙했는가 하는 것은 저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주변의 지인들을, 나아가 타인들과 이 사회를, 세계를, 인류와 자연을 신뢰하고 있는지의 정도에 달려있다. 부모나 친구, 혹은 사랑하는 이처럼 사회 역시 어떤 때는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우리를 옥죄는 억압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기대고 안길 수 있도록 품어주는 요람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생각이 중심을 잃으면 대상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수성가나 혁명을 꿈꾸는 양 극단의 어딘가에서 무한 셀프를 외치며 외로워하거나 끼리끼리 골목에서만 놀게 될 뿐이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 옛 속담처럼 물이야 셀프로 마신들 어떠랴. 하지만 '물만 셀프'로 하면 어떨까. 한 끼니의 밥상 위에도 누군가의 땀으로 키운 곡식이며 이동된 재료들이 우주처럼 사이좋게 놓여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우리들의 삶과 세계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이 모이는 물목, '아우라지'

극장에서 다 같이 보던 영화도 이제는 각자 제 방에서 모니터나 스마트폰으로 감상하고, 콘서트장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울고 웃으며 감상하던 음악도 모두들 제 귀에 꽂힌 이어폰으로만 혼자 듣는 요즘이다.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사는 시대랄까. 그런 면에서 특별한 리더 없이 느슨하게 이어져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흩어질 수 있는 힙합 고유의 '크루(crew)'문화는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생각해 볼만한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2007년 부산에서 결성된 '아우라지'는 부산과 서울, 대구 등지의 힙합 아티스트들이 모여 활동하는 힙합 크루다. '아우라지'의 초창기부터 실질적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홍기표는 대학가요제 입상, 대학국악제 입상, 세 장의 싱글 앨범 발매 등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만의 독립적인 음악활동을 위해 6년째 직장을 다니며 아티스트, 기획자 등의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그가 올해 4월 경성대 앞에 'Revel(레블)'이라는 흥미로운 공간을 오픈했다. 매주 금·토요일 저녁마다 힙합을 비롯한 블랙뮤직과 스트리트 컬처 공연 및 파티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에 로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후쿠오카와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는 일본의 프로듀서 사토 비츠와 함께 '아우라지'의 공동앨범을 발매하기도 한 이들의 활동이 부산 문화계에 젊고 신선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아 주목된다.

'여러 갈래의 물이 한데 모이는 물목'을 의미한다는 순우리말 아우라지의 뜻처럼, 이들은 각자의 고유한 개별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되 셀프 본연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단단한 행보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주목된다.


# 2007년 부산서 결성, 힙합 중심 '서브컬처' 활동…일본 뮤지션과도 협업 성과

■ 홍기표와 '아우라지'

	힙합 크루 '아우라지'의 홍기표(왼쪽)와 일본 뮤지션 사토 비츠가 후쿠오카에서 공연하는 모습. 얼라이브 뮤직 제공

홍기표(KEYPYO)는 힙합 크루 '아우라지'(www.facebook.com/auragemusic)의 대표이며 힙합 음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서브컬처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아티스트다. '아우라지'는 부산은 물론 서울, 대구 등 전국을 무대로 다양한 공연 및 기획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GOOD MUSIC GOOD PEOPLE', 즉 '좋은 음악은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철학으로 2007년 부산에서 결성했다.

부산 유일의 힙합 레이블 '얼라이브 뮤직'(www.alivemusic.kr)에 이어 올해 4월에는 힙합뮤지션들은 물론 디자이너, VJ 등 다양한 서브컬처 아티스트들이 일상적으로 공연과 파티 등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 '레블'(Revel)을 경성대 앞에 오픈했다. 지난해에는 후쿠오카와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는 일본 뮤지션 사토 비츠(SATO BEATS)와 함께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대안문화행동 재미난 복수가 기획하고 부산의 디자이너 젤다(ZELDA)가 앨범 커버를 디자인했으며 일본의 디자이너가 함께하는 등 부산과 일본의 여러 장르 아티스트들이 협업한 의미 있는 결과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학자·호밀밭 출판사 대표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