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는 원주민을 제압하고 프라이데이를 노예로 삼는다.

- 침략과 살인으로 욕망을 채우고
- 이를 지키기 위해
- 다시 총칼을 휘두르는 악순환
-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 숱한 근대적 모험담에
- 우리는 스스로를 이입시켜 왔다

인디언이라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부족 간 다툼을 절제된 폭력으로 해결했다. 대개 사냥터를 둘러싼 충돌 해결의 열쇠는 상대의 살상이 아니라, 격투 과정의 용기와 죽일 수 있는 상황까지 가서도 죽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들의 싸움은 상대의 얼굴을 마주하고 표정을 읽으며 대결하는 소통의 한 형태이다. 그 목적은 정복과 지배가 아닌 용맹의 겨룸이었다.

이들의 터전에 느닷없이 등장한 서구인은 얼굴을 모르는 상대를 멀리서도 죽일 수 있는 총포로 인간의 용기를 대체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 사전'에서 인디언들은 서구 정복자들과 맞서 싸울 때 그저 창으로 상대 어깨를 치는 방식을 썼다면서, "창으로 찌를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총을 쏘는 것으로 대응했다"고 설명한다.


정복과 학살로 출발한 근대

역사가들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근대의 출발로 삼는 데 동의한다. '발견'의 관점에서는 그곳이 오래전부터 원주민들의 땅이란 사실을 무시한다. 자기들이 일단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하나님 은총으로 얻은 '새로운 땅'(new land)이었다.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귀향하는 목적 달성을 위해 학살과 잔인한 착취를 당연시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원주민, 유색인을 인간이 아닌 개척의 '장애물' '걸림돌', 아니면 부려야 할 '노예'로 여기는 사고를 체계화하는 신학적·과학적 지식이 발전했다. 근대 서구인들은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원주민 학살, 흑인 노예사냥과 무역, 식민지배 등 잔혹한 행위를 하면서도 '법'과 '이성'을 내세우며 양심의 가책을 회피하고,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떳떳할 수 있었다.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 1000만 명이 학살됐고, 아프리카 흑인 1000만 명이 노예사냥과 대서양 운송 중 사망했다. 나머지 1000만여 명의 아프리카인이 '무사히' 노예로 팔려 근대문명을 먹여 살리는 탄광·대농장에서 소나 말처럼 노역했다. 이것이 우리가 속한 제1 제국 자유주의 500년 근대화의 역사다. 제2 제국 사회주의 러시아는 수백만을 학살하거나 유형지로 보냈다. 역사 발전을 주도하는 제국 건설의 목적을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삼은 참혹한 결과였다.

그러나 서구 좌·우 지식인들의 강고한 지식 체계와 인종적 편견으로 이런 사실은 심각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반면, 전 유럽 극우 모더니스트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제3 제국 나치는 1, 2제국보다 역사가 짧고 백인과 유사한 유태인을 학살했고, 또 결정적으로 패전했기 때문에, 도덕적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크루소와 타자의 발자국

	'로빈슨 크루소'의 초판본.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기이하고 놀라운 모험들'(1719)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고방식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품이다. 인간(생명)을 물건으로 취급하도록 유도하는 작품들은 '보물섬' 같은 모험과 개척 이야기들, 할리우드 서부극, '람보'류 전쟁영화들로 계승되고 있다. 영문학자 이언 와트는 '로빈슨 크루소'를 "서구인들의 특징적 열망 중 하나를 외곬으로 추구하는 주인공의 불후의 이미지가 구현된 작품 중 하나"로 평가한다.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배를 탄 크루소는 생사 갈림길을 넘나드는 모험을 겪은 끝에, 이미 개척된 브라질의 대농장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보장이 있었지만, 더 쉽게 성공하고 싶어" 아프리카로 노예무역을 위해 나선다. 풍랑을 만나 동료들을 잃고 홀로 무인도에 도착하는데, 거기서 크루소는 "불굴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지칠 줄 모르는 노동"으로 준비하고서야 안정을 찾는다. 아니, 이에 더해 방벽을 세우고 화약과 총으로 무장하고 비로소 안심한다.

크루소는 '과대 자극된 욕망-탐욕스런 추구와 소유-배타적 경계와 공포'의 삼각 순환공식을 완성한다. 공간 정복과 정복된 공간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한 강박과 공포의 극적 전환점은 인간 발자국(footprint) 발견에서 마련된다. "마치 벼락 맞은 사람처럼 심장이 폭발"할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질린 그는 요새를 재정비하고, 매일 순찰한다. 그런 한편, 두려움의 원인인 '야만인'의 소유를 욕망한다.

"몇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이들을 제압해서 완전히 나의 노예로 만들고, 내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복종하도록 길들이며, 나에게 절대로 해를 가하지 못하게 만들" 계획을 꾸민다. 이윽고 섬을 찾은 '야만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하고, 희생양이 될 뻔했던 남자를 구출하여, "영원히 나의 노예"로 삼음으로써 "내 꿈은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크루소는 그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Thank God, It's Friday). 결국, 그는 28년 섬 생활을 마감하고 지나는 배에 구출되며 브라질 농장의 재산을 되찾아 금의환향한다.


근대적 욕망의 발자국

	어린이용 '로빈슨 크루소' 그림책. 배윤기 제공

숱하게 쏟아져 나왔던 '성공 이야기'들로 조장된 꿈을 자기 꿈으로 착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주인공은 발견·정복·지배의 과정을 감당할 재력과 체계적 관리 능력을 갖춘 사람들(상인과 부르주아)이었다. 영웅적인 모험 이야기들과 이를 포장하는 지식의 문화정치적 효과는 결국 '1%를 먹여 살리는 99%'라는 승자독식(勝者獨食) 구조의 강화였다.

흑인 작가 세제르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성공담은 인간을 물건화(thingification) 하는 지배자의 시각만 나타낸다. 유사한 관점에서 철학자 부버는 "우리가 우리 시선을 지배자에서 피지배자로 돌려서 근대적 노동과 소유의 양식을 고려해본다면, (근대적 사고의 발전은) 인간 존재가 서로 마주 서고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해온 인간 삶의 흔적들을 깡그리 말살해 온 과정이 아닐까"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99%의 이웃들과 마주서서 소통하고 이해하기를 꺼리는 반면, 언제나 거대하고 화려한 1%의 이야기에 눈을 고정하지 않았던가? 폭력과 학살을 위장하고 포장한 서구인의 거대 탐욕의 이야기를 보편적 진리로, '나의 이야기'로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또 순응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도 그들처럼 발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닦달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디언'과 '흑인'들을 생산해왔던가? 이런 질문이 바로 크루소의 모험담이 한국 사회에 남긴 근대적 욕망의 발자국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 유럽전역 인기…일확천금의 욕망을 자극한 '샘'

근대소설의 출발로 평가되는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1660 ~ 1731)는 잡화상, 무역업자, 언론인, 그리고 작가였다. 크루소의 인기는 작가 생전에 8판까지 출판되었다는 사실보다 확인된 해적판이 다섯 개 판본이며, 유럽 전역에 번역되고, 번역본보다 더 많은 종류의 해적판이 출현했으며, 끊임없이 다시쓰기 판본들(the Robinsonard)이 나오고 있다는 '크루소 신드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쇄기술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여행기, 탐험기, 모험담 등이 서구인들에게 '일확천금'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

헐값에 '로빈슨 크루소'의 판권을 넘겼던 디포는 자신도 선풍적 판매의 혜택을 누려보기 위해 2편, 3편을 발표했으나, 기대만큼 못했다고 알려진다. 어떤 시각으로 보든 그 인기는 여전해서, 최근까지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존 쿳시의 '포' 등 크루소 다시쓰기 판본들이 나오고 있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