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는 탐욕의 그물망에 걸린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그물망에서 벗어나라고 우리를 깨웠는지도 모른다. 사진은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열린 세월호 촛불집회 모습. 연합뉴스

- T.S. 엘리엇의 詩 '황무지'
- 문명이 약속한 미래에 도취
- 2차 세계대전의 징조 못본 현대인에게 경고 메시지

- 가수 이태원 불렀던 '솔개'
-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이
- 전체주의 사회 지탱위해
- 유통한 공허한 언어 비판

- 엘리엇·이태원 시절 상황
- 아직도 현재진행형 반복
- '파이 커진다' 유혹하면서 권위의 맹목적 추종 명령

인문학은 말(언어)을 연구한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 혹은 '존재의 집'이다. 말을 통해 생각을 탐색하고, 삶(의 양식)을 모색한다. 말과 앎과 삶이 인간관계 안에서 상호 배신하지 않을 때, 인간의 무늬가 만들어진다. 말과 앎과 삶이 각각 분리돼 따로 놀며 상호 배신할 때, 관계와 사회는 '권위 없는 지배'로 '말의 폭력'을 일상화하고 정당화한다.

근대학문의 발전은 말 따로, 앎 따로, 삶 따로, 저마다 별개인 양 본질적 원리를 연구하고, 시스템이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이상을 제시하며 전문화해왔다. 이런 가운데, 말은 기호와 공식과 명령으로 대체되고, 앎은 그것들을 훈련하여 암기하는 방식으로 변질하며, 삶은 시대에 걸맞은 표준과 대세에 따라 살아지도록 유도돼왔다.

■말·앎·삶을 분리하는 근대문명

4월은 잔인하다. T. S. 엘리엇은 '황무지'(1922)에서 역설적으로 노래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겨울은 우리에게 오히려 따뜻했었다./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어주고/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목숨을 먹여 살려주었다."

엘리엇은 제1차 대전 후 호황을 구가하는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이 시를 썼다. '망각의 눈으로' 덮어줘 차라리 따뜻했던 겨울이 근대의 마약이라면, 그에 도취한 현대인은 '잠든 뿌리'다. 해서 눈 뜨기 싫은 우리를 난데없이 '봄비로 흔들어 깨우는' 4월은 무엇보다 잔인하다. 눈 뜨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말하기 귀찮아 편안히 죽은 땅에서 연명하는 현대인에게, 똑바로 보고 말-앎-삶을 연결하는 고통을 겪으라는 역설적 권유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차례 세계대전이 터졌다. 근대문명의 달콤한 이야기들은 그 화려한 미래상의 의미를 제국주의 전쟁과 대량살상으로 실현했다. '잠든 뿌리'들은 마침내 4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기들이 동조 혹은 순응해온 문명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법·규정 따위가 지탱하는 근대 시스템의 공적인 언어들은, 구체적인 말-앎-삶의 관계를 분리하고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기호와 의미의 사이에 개인적 이익이든 패거리의 한탕이든 목적 추구에 맹목적인 냉혹한 인간들의 활동 공간을 만든다. 이것이 전후 세계에 쏟아진 '탈근대' 혹은 '포스트모던' 논의가 기호(말)가 의미(삶)와 따로 논다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형형색색 말로 포장된 이데올로기의 순수성을 믿고 돌진해봤지만(스페인 내전), 그 무한경쟁과 각축이 도달한 곳은 역사적인 영웅(정치인과 자본가)의 손익계산서만 남기는 혁명(러시아)과 전쟁(제국 건설의 경쟁)이었다. 결국, 이념·국가·자본을 위해 숱한 생명을 기꺼이 던져온 역사 바깥의 인간에게, 기호가 지시하는 바와 의미는 따로 놀거나 그 지시 내용의 실현이 영원히 지연되고, 남은 것이라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뿐이었다.

■잔인한 배신의 4월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목소리를 총칼로 쏘고 베어버렸던 정권이 있었다. 이들의 국정 목표는 '정직, 질서, 창조'였다. 국민은 그들만의 '선진조국 창조'를 향해 계획된 발전적 미래상에 충성을 맹세하고 일사불란하게 따라야 했다. 자기들 목표와 미래상에 부적절한 용어들, 저항의 목소리들, 부정적인 의견들은 싹부터 제거했다. 이제 '긍정적인' 언어들만이 유통되었다. 대중매체가 사용하는 그런 단어들이 그려내는 사회는 아름답고 안정되어 보기 좋았다. 전두환 군부의 칼날이 시퍼렇던 1982년 가수 이태원이 불렀던 '솔개'(윤명환 작사·작곡)는 역설적이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권태 속에 내뱉어진 소음으로, 주위는 가득 차고/푸른 하늘 높이, 구름 속에 살아와/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느덧 내게 다가와/종잡을 수 없는 얘기 속에, 나도 우리가 됐소/바로 그때 나를 비웃고, 날아 가버린 나의 솔개여/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솔개'는 공식적이고 사회적인, 그래서 공허한 언어가 그려내는 추상적인 관계와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우리'라는 말과 실체를 잔잔하게 불신한다. 허황한 형체에 도취한 채, 구체적인 관계 안의 진짜 우리가 서로를 외면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잃어가는 실체 있는 말과 앎, 너와 내가 그려가야 할 삶의 무늬, '나의 얼굴'을 환기한다.

■미래는 늘 연기된다

노래는 "애드밸룬 같은 미래를 위해, 오늘도 의미 없는 하루/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 속에서, 나도 움직이려나/머리 들어 하늘을 보면, 아련한 친구의 모습/수많은 농담과 진실 속에, 멀어져간 나의 솔개여"라고 끝맺는다.

노래가 나왔던 그때는 지금도 반복된다. 언제나 하나같이 미래를 이야기하고 '파이'가 커진다고 유혹한다. 위험하니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라"고 늘 훈계하고 명령한다. 성급한 땜질과 화려한 도금에 환호해 온 우리는 오로지 회피와 은폐와 조작의 언어 전략 앞에 침묵하거나 소음만 생산하도록 길들였다. 그래서 '그 아이들'처럼 착하고 순진하게 권위 없는 지배의 말들을 잘 믿고 따랐으며, 그렇게 밥상머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세월'은 흘러, 일과 일자리를 사랑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노동자들이 점점 더 양산되고 있다. 머지않아 국가 발전과 효율을 위해 국민도 정규·비정규·알바 따위로 분리되지 않을까?

세상을 초월하여 구원받기를 선언한 배(世越號)가 속세의 다양한 관계 집단의 복잡한 이해와 탐욕의 그물망에 뒤얽혀 침몰하며 잠든 우리를 깨웠는지도 모른다. 시스템, 기계, 장비가 효율과 이익 실현에 효과적이지만, 일은 인간이 한다. 우리는 이 중요한 이치를 항상 이미 망각하고 있다. 갈수록 더 많은 인간이 경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세계 제일의 '자살 공화국', 오래된 오늘, 나 그리고 우리 자화상 아닌가?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본다면, '황무지'의 숫자 4는 단지 형상이고 비유다. 그 4월은 항상 '지금, 여기'다. 그래서 상황 논리에 묻혀 갖게 되는 단순한 죄의식은, 미안함은, 어쩌면 위선일 수도 있다. 바로 이 위선과 진심의 사이에서, 잔인한 4월은 생활공간을 토대로 말-앎-삶을 다시 연결하며 힘들게 겪어나가야 할 깨달음과 선택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솔개는 우리의 친구로 돌아올 것이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 T.S. 엘리엇과 '솔개'

작가 T. S. 엘리엇(1888~1965·사진)은 열렬한 모더니스트이자 엘리트주의자이다. 그럼에도 근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가운데, 그의 의도와는 별도로, 근대의 '경계 너머'를 사유할 하나의 창으로서 '황무지'라는 긴 시를 남긴다. 전후 유럽 문명의 정신적 풍토를 묘사한 이 시는 영국 시문학계의 금자탑으로 꼽힌다.

노래 '솔개'는 당시 검열을 통해 어김없이 몇몇 부분이 '긍정적' 단어로 '순화'됐다. 순화된 가사는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발언을 의미 없는 소음으로 변환하는 우리 사회 시스템의 탁월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