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

- 16C 양모에 대한 수요 급증
- 귀족·성직자들의 탐욕 자극
- 영국서 엔클로저 운동 시작
- 자영농들을 땅에서 내쫓아

- 수많은 '장발장'들 생겨나자
- 당대 지배층들 합리화 시도
- 해외영토, 구획된 들판 등
- 계몽적 용어로 폭력 감춰

- 졸지에 '침입자'로 전락한
- 당시 영국 농민 게이트워드
- '민영화' '개발' 등 미명하에
- 오늘날에도 양산되고 있어

유럽 르네상스 전성기 이탈리아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자기 조각품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조화의 비결을 "간단합니다. 먼저 대리석 하나를 고릅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깎아내면 됩니다"라고 설명한다. 불필요한, 쓸모없는, 여분의 것들을 잘라버림으로써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만족스러운 형태가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를 '근대적 창조의 비법'으로 평가한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내가 무엇을 본다고 했을 때 있는 자체로 보느냐, '나'의 목적(目的·눈의 과녁) 달성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무엇을 달리 취급한다.

그 무엇이 목적의 대상이 되는 과정은 '나'의 생각과 설계에 대상을 맞추는 까닭에 대상의 의지와 무관하다. 이를테면 미켈란젤로의 조각칼과 망치가 대리석에는 무자비한 폭력이 된다. 만약 이 논리가 살아있는 대상과 그들 삶의 터전에 던져진다면, 어떻게 될까?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Utopia·1516)'에서 동시대 땅을 보는 눈(시각)의 변화를 귀족·성직자·신흥 부르주아들의 '탐욕'에 빗대어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풍자했다. 원격지 무역 발달로 영국산 고급 양모 수요가 대폭 늘어나자, 이들은 토지를 양 방목지로 전용할 목적으로 '무질서'하고 '불법적'인 경작지를 구획하고 울타리를 세워 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경제적 이윤에 눈을 뜨는 한편, 거기서 살아온 사람들과 전통문화가 깃든 마을들에 눈 감았다.

"양들은 이제 들판과 가옥들과 마을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지요."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세계를 질서정연하게 조직하는 목적 앞에서 노동과 삶의 관계로 수천 수백 년 누려온 토착 문화는 소멸하고, 생존 기반을 잃은 사람들은 "떠돌이 부랑자로 체포되어 게으르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 십상"이었다. 이들은 "결국 도둑질을 하고 당연히 교수형에 처하는 일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자영농 또한 "사기나 공갈 협박을 통해 땅을 포기하기도 하고, 조직적으로 학대를 당하다가 결국 땅을 팔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기도" 한다. 어울리지 않는, 부적합한, 불량한 장애물들이 하나씩 제거되자, 전체적으로 보기에 좋았다. 결국, 정리된 목초지에서 짐승을 관리하는 목동이나 소몰이꾼 하나만 필요하게 됐다. 땅에 질서를 부여하자, 엄청난 효율성이 현실화되었다.

■근대 지식의 초학문적 공모

	토머스 모어가 만든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는 탐욕의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 상상한 사회다. 그림은 유토피아 상상도

이런 작업은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으로 파급됐다. 먼저 16, 17세기 영국에서 유행하고, 17, 18세기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 '사이'에 우리가 '레미제라블'에서 목격하듯이, 빵을 훔쳐 먹다 붙잡혀 사형 또는 수감되는 운명의 '장발장'들이 수많은 쓰레기로서 생산된다. 또한, 이는 치안 확보의 이유가 되고, 곳곳에 보호소·감옥·정신병원 따위를 세워야 하는 필연적 사회 배경이 된다.

근데 이거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눈 뜨고 보면서도 도덕·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필요가 생긴다. 근대 지식은 '발전' '진보' 따위의 이름으로 이를 합리화, 정당화하는 데 주력해왔다. 분류, 체계, 질서, 표준 등을 통해 이성이 지배하는 투명성을 실현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감성, 불투명, 무지한 세상을 향해 '계몽의 빛'을 던졌다. 해외 영토, 구획된 들판, 설계된 경관 같은 과학적 용어들이 생산되고, 국민 교육을 통해 '전체'의 목적을 '자기' 목적으로 도착(倒錯)하게끔 사람들 의식을 교화해나갔다.

강한 빛 앞에서 시력이 상실되는 것처럼, 계몽의 빛이 폭력적인 '사이'를 가려주자 도덕과 양심은 편안해졌다. 엔클로저를 연구한 어느 영국인 학자가 공공적 담화 체계를 변화시켰던 지식인들의 다양한 노력을 "초학문적 공모"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거주'와 분리되는 근대적 '공간'

	1516년 발간된 '유토피아' 표지. 배윤기 제공

1603년 영국 동부 링컨셔의 한 법정에서 '게이트워드 소송 사건' 심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피고는 '방랑 혐의'로 체포된 스티븐 게이트워드, 원고는 지주였다. 원고는 '부랑자' 게이트워드가 자기 땅에 들어온 '침입자'라고 주장했고, 피고는 자기가 "기억이 없었을 때부터 그 땅의 거주자"라고 진술했다. 지주는 땅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거주자는 오랫동안 전래한 '사용권 관습'을 각각 옹호했다.

거주(inhabiting)라는 말은 '관계하다', '같이 살다', '거주하다'란 뜻을 모두 품는 살아가기(habiting)란 단어에서 파생되고, 인간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라틴어 에 뿌리를 둔다. 거주자는 일정한 땅에 살면서, 그 특정 장소와 사람들과 관계하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인간-땅-관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근대 법정은 이런 시각과 생활방식을 전근대적이며 불법이라고 판결한다. 땅을 구획하고 등기하여 성립된 '근대적' 소유권과 소유하지 않더라도 경작과 거주만큼은 보장해왔던 '전근대적' 사용권 사이에서, 법정은 '거주자'라는 뜻이 불투명, 모호하다고 해석한다.

문서상 기록만 합법적 권리로 인정한것이다.

법이 사이를 없애는 순간, '거주자' 게이트워드는 '범죄자'로서 수감된다.

미켈란젤로의 선언, 엔클로저, 토지조사사업, 새마을, 도시(재)개발 따위를 거쳐 온 근대화 과정에서, 인간은 동료 인간으로부터, 땅으로부터, 관계로부터 '폭력'에 의해 분리되어왔다.

그리고 오늘도 공유지(재산)를 '우범지대'로 재현하여 겁주고, 빛나는 '개발 계획', '구조 조정', '경영 합리화' 등으로 유혹하여, 합법적으로 먹어치우는 작업들이 '민영화(privatization)'란 이름으로 계속되고, 수많은 게이트워드들이 생산되고 있다.


# 토머스 모어와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가 만들어낸 말,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아니다'(ou)와 '장소'(topos)가 뭉쳐져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no place)이란 뜻이 됐다. 땅-생산-분배가 공유되는 그곳은 동시대 기독교 유럽 국가를 지배하는 탐욕의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 상상한 사회다.

자유 발언이 곧 죽음이 될 수 있는 동시대 유럽에서, 마치 현실을 모르는 광대가 무제한 발언 허가를 받는 것처럼, 영국의 경계 너머 유토피아로 가는 소설 형식을 취함으로써 비교적 안전하게 불쾌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1447년 평민으로 태어나 대법관까지 올랐던 모어는 퇴임 후, 가톨릭교도로서 국교회 수장인 영국 왕의 이혼에 반대하다 1535년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당했다. 1935년 가톨릭교회는 그에게 시성(諡聖)했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