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 시민들'에서 로댕이 포착한 얼굴은 이데올로기가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무늬다. 버겁지만 묵묵히 자기 짐을 짊어지는 진정한 용기의 얼굴을 보여준다. 사진은 프랑스 칼레시청 앞의 '칼레의 시민들'. 배윤기 제공

- 유럽 백년전쟁 당시 佛 칼레市
- 영국군에 포위당해 몰살 위기
- '6명 희생하면 免死' 英 제안에
- 몇몇 시민대표 성 밖 걸어나와

- 1884년 조각 의뢰받은 로댕
- 국가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 용기있고 늠름한 영웅 아닌
- 고통과 체념의 군상을 구현

- 애국심을 신화화 일본 우익
- 살아있는 실체인 위안부를
- 기억속에서 애써 삭제 시도
- '지금, 여기'의 모습 눈감아

유럽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영국군에 포위된 채 저항하다 고립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한 프랑스 한 도시가 있다. 끈질긴 항전에 분노한 영국 국왕은 명령했다. 지도층 중 6명을 뽑아 그들 손에는 성의 열쇠를, 목에는 교수형 올가미를 두르고 성을 나오면 본보기로 처형하고 나머지는 살려주겠다고 했다. 성 안의 논의는 어렵지 않았다. 몇몇 대표가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자청했기 때문이다. 그 고귀한 정신은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귀족의 의무)의 유래가 됐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로댕의 작품

조각가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은 이 '역사적' 이야기를 담았다. 1884년 조각 제작을 의뢰한 칼레시 당국의 원래 의도는 영웅 동상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였다. 당시는 '열강의 각축'이 해외 식민지 쟁탈과 유럽 내 갈등으로 나타나고, 세계사를 선도하는 국가 건설을 위해 국가주의·애국주의가 드높았다. 그러나 1889년 완성된 로댕의 조각은 논쟁에 휩싸였다. 동시대 많은 공공 조각이 보여주는 '전통적 영웅의 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용맹한 모습도, 고귀한 교훈도 주지 않고, 게다가 위대하게 보이게 높이 올리지도 않고, 바닥에 설치하도록 제작했다. 더욱이 시민대표 6명의 표정이 영광스런 이미지가 아니라, 그저 "고통과 번뇌와 체념"뿐이라는 항의였다.

하지만 로댕은 자기희생의 주인공들 모습을 사실적으로 구현한다고 해명했다. 그는 시민이 걸어가다 조각상을 "거의 충돌하듯이 만나" 일상적인 연대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20년가량 뒤에야 부분적으로 이뤄졌다. 논란의 조각상은 한적한 공원 입구 높은 단 위에 설치됐다가 1926년 신축한 칼레 시청사 앞 한결 낮은 단 위로 옮겨졌다.

늠름하고 웅장한 위용을 통해 애국·멸사봉공·영웅을 강조하고 칭송하고 싶은 여론과 달리, 로댕에게는 죽음을 선택하고 맞으러 가는 순간의 구체적인 사람들이 중요했다. 동료 시민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대표해 누렸던 부와 권력의 대가를 스스로 치르려 나섰으나 막상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으로, 위기의 공동체를 구하고자 성문을 열고 나가는 얼굴과 몸짓을 같은 높이에서 보자는 의도였다.

■국가의 시간과 시간·기억의 조작

	위안부 소녀상은 군국주의 일본의 진실과 아직도 이를 감추려는 일본 보수 정권의 의도를 알려주고 있다. 순수한 애국심에 호소하는 전체주의의 부름은 국가의 우월성을 과신케 함으로써 살아있는 실체조차 부정하고 지우려 한다.국제신문DB

시민의 불만은 '순수한 애국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례에서 그런 애국심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순수한 애국심은 목표가 '신성하기' 때문에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나치즘의 공포 속에서 자기 고뇌와 성찰의 '자유로부터 도피'했던 독일인도, 군국주의 시기 일본인도, 나라를 계몽하고 근대화하기 위해 "주권 일부를 떼 주었던" 우리나라 친일인사도 애국자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친일을 미화하는 일본 우익과 한국의 일부 식자 또한 '순수한 애국심'을 공언한다. 이들의 애국심은 하나같이 "객관적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위안부 할머니'라는 살아있는 실체를 "객관적으로"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한다.

대개 손에 잡히지 않는 '신성한 가치'가 의무로 되는 과정은, 역사적 근거(과거)를 통해 정체성을 부여하고, 구원과 성취의 약속(미래)으로 기대감을 높여, '나의 가치'로 성립시킴으로써 완성된다. 따라서 신성한 가치나 의무가 목표로 하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내 시간과 공간은 양도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이론적으로 즐겁고 유쾌해야 하는데, 과정적으로는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겉으로 표현되는 목적의 신성함과 실제로 경험되는 실상의 구체성 사이에, 언제나 관계들 안에 전제된 권력의 이익구도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가 넓어질수록 시간과 기억이 조작되고 강요될 수 있는 공간 또한 넓어진다.

■허위와 진실을 넘는 인간의 무늬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사회적 문제는 바로 이런 목적의 신성함과 실상의 구체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 '사이'의 거리를 좁힐수록 시간은 우리에게 덫을 놓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대화에서 강력한 공감을 느꼈을 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너와 나의 구분도 사라진다.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은 또한 없어진다. 아니면 초월한다. 이전과 이후가 자취를 감추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지금, 여기'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경험할 가능성의 토대가 앞으로 우리가 논의할 로컬리티의 시공간이다.

다시 '칼레의 시민들'로 돌아 가보자. 로댕의 예술적 언어의 장소는 어디일까. 그 사건과 관련한 당대 기록은 20여 가지 있다. 그중 어느 연대기 작가가 쓴 기록 하나에 근거해 프랑스인이 기억하는 역사가 구성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기록은 목에 교수형 밧줄을 매고 성 밖을 나서는 행위는 항복을 선언하던 당대의 '의례적 행사'라고 설명한다. 결국, 알려진 그 사건은 허위일 수도, 진실일 수도 있다. 사건의 진위를 넘어, 로댕이 포착한 얼굴과 몸짓은 이데올로기가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무늬가 아닐까. 국가·사회의 이름으로 교육되어 즉각 유통되는 과장된 영웅 이미지를 거절하는 그 모습은 표준 이미지의 경계를 넘어서 삶의 터전과 일상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다. 그 원점을 놓치지 않는 로댕은 사람들이 서로 배신하지 않고 버겁지만 묵묵히 자기 짐을 짊어지는 그런 진정한 용기의 얼굴들, 몸짓들을 껴안는다.

로댕의 언어는 허위 혹은 진실, 그 경계와 사이가 사라지는 순간, '지금, 여기'를 재현한다. 그 자리가 바로 인간의 무늬를 생성하는 대화와 공감의 장소다. 이 장소에서 "예술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기다"라는 백남준의 말과 "이 세상에 진실과 허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좋은 가짜와 나쁜 가짜뿐"이라는 감독 오손 웰스의 이야기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현대적 방식' 비판적 논의, 대안적 상상·시공간 모색

가능성의 시공간 위에서 상상해보자. 이미 설계돼 '위로부터' 유혹하는 동시에 위협하는 미래가 아닌, 미결정(open)의 미래는 '아래로부터' 협의의 공간을 함께 준비하도록 요청한다. 거기서 미래는 구체적인 만남과 대화로 대안적 관계를 생성하는 미래다.

경계의 인문학은 경계에서 다양한 시간을 사는 방식이 공존하는 삶의 가능성과 협의 가능성(negotiability)의 문을 함께 열어갈 지혜를 모색한다. 로컬리티는 이상적이지도 않고, 될 수도 없으며, 구별되지만 '차이'와 '차별'로 분리되는 '사이'가 사라지는 현장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가진 '현대적 방식'이 어떤 맥락에서 유래되었던가를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그 사이와 틈새를 파고들어 대안적 상상과 시공간을 모색한다. 앞으로 경계의 인문학 시리즈는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그런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궁리하며 나눌 것이다.

배윤기·부산참여연대 부설 리더십교육센터 소장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격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