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가 런던의 작업실에서 초상화 작품 '푸른 스카프를 맨 남자(Man with a Blue Scarf)'를 완성한 후 모델을 맡은 이 책의 저자 마틴 게이퍼드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도슨이 촬영했다. 디자인하우스 제공

20세기에는 두 명의 '위대한' 프로이드를 배출했다. 한 명은 널리 알려진 대로 정신분석이론을 창시한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1856~1939)다. 또 한 사람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세계 화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실주의 화가로 꼽히는 루시안 프로이드(Lucian Michael Freud·1922~2011)이다. 그런데 주로 인물 초상화를 그린 구상화가인 루시안 프로이드가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손자라는 사실은 잘 모르는 이가 많다. 손자 프로이드는 사망하기 3년 전인 2008년 5월 초상화 작품 'Benefits Supervisor Sleeping'(1995년작)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3360만 달러(약 351억 원)에 팔림으로써 당시 생존 화가 작품 중 세계 최고 판매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인 마틴 게이퍼드가 쓴 내가, 그림이 되다는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에 관한 책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자 스스로 프로이드의 말년에 초상화 '푸른 스카프를 맨 남자(Man with a Blue Scarf)'의 모델 역할을 하면서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7개월여 동안 그와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저자는 2003년 11월 28일부터 2004년 7월 4일까지 런던에 있는 노화가의 작업실에서 모델로서 30회에 걸친 만남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81세에서 82세로 넘어가고 있던 노화가와의 만남이었으니 대화 내용은 자연스럽게 프로이드의 생애와 예술론, 시대정신, 지인들과의 관계, 작업에 임하는 자세와 소소한 습관 등을 망라한다. 이 책은 노화가에 대한 단순한 전기 수준을 넘어 그의 은밀한 심리적 생태적 상태와 지적 면모까지 생생한 육성과 행동을 통해 그려낸 한 편의 사실적 그림인 셈이다.

덕분에 독자는 화가, 그것도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팝아트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활개친 시대에 확신에 찬 대담한 행동과 능력으로 구상화의 전통을 부활했다고 평가받는 세계 최고 구상화가의 가장 사적인 장소라 할 수 있는 작업실로 초대받는다. 예술 작품이 창조될 때까지 벌어지는 여러 일을 매우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 셈이다.

저자는 자신이 그림이 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더불어 거장의 생애와 예술론에 대한 풍부하고 진솔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 이 책을 썼다. 조지 오웰, 피카소 등의 지인들과 프로이드가 나눈 숱한 일화와 대화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다양한 프로이드의 작품뿐 아니라 작업 중인 프로이드를 촬영한 사진작가 데이비드 도슨의 사진까지, 68장의 화려한 컬러 도판이 책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