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 뭉게구름 그리고 매미 소리가 여름의 한가운데를 알리고 있다. 여름 햇살은 모든 것을 녹일 듯이 너무 뜨겁기만 하다. 오히려 밝고 환한 빛은 그늘진 나무들 사이로 어룽대는 햇빛이다. 그늘의 시원함과 빛의 밝음을 동시에 가진 여름날 숲 속은 착시효과 같은 신비로움이 있다. 청량한 이야기도 있을 것 같다.

정지아의 세 번째 소설집 '숲의 대화'(은행나무)는 바로 그런 여름날 숲 속에 어룽대는 햇빛 같은 책이다.

우리 사회 그늘에서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가는 장애인, 노숙자, 결혼이주여성, 노인들에게 한 줌 햇볕을 비추며 그런 삶조차 얼마나 눈물겹게 소중한지 가만가만 이야기하고 있다. 정지아의 이름 앞에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아버지가 싸웠던 '지리산'과 어머니가 활동했던 '백아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아'인 그는 태생이 좌파이지만, 이번 작품집 전반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언뜻언뜻 미소 짓게 하는 따뜻함이 있다.

11편의 작품 중 표제작인 '숲의 대화', 2009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봄날 오후, 과부 셋', '혜화동 로터리'는 빨치산 활동을 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숲의 대화'는 운학이라는 노인이 아내의 유골을 뿌린 잣나무 숲에서 이념을 좇아 빨치산이 된 도련님을 만나는 이야기다. 도련님은 자신의 아기까지 가진 여자를 운학에게 보낸 뒤 산에서 죽었다. 아내에게 도련님은 이념이었고 운학은 그런 아내를 평생 짝사랑하며 살았다. 도련님과 아내, 그리고 운학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하지만 연결되어 있으며, 갈등하지 않고 각자의 운명을 긍정한다.

'봄날 오후, 과부 셋'에는 약방 조수와 결혼해 큰돈을 벌었지만 일찍 남편을 여읜 에이꼬, 돈은 없지만 남편 사랑 하나로 버텨온 하루꼬, 미모의 모범생이었지만 남편이 빨치산 활동으로 죽은 뒤 좌파의 기품(?)을 유지하며 살아온 사다꼬. 이들 세 사람이 평생을 친구로 지내면서도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빙그레 웃음 짓게 된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이념의 시대를 살아온 최, 박, 김이 등장한다. 최는 빨치산, 박은 미군 켈로부대 출신이며 이들 사이에 끼어 평생 술 시중을 드는 후배 김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대학교수이다. 최와 박은 만날 때마다 아웅다웅 마치 만담을 하듯 과거를 희화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세 작품의 등장인물은 모두 80대 노인으로 상처마저 세월의 풍파 속에 흐려지지만, 오늘 하루를 정답게 살아내고 있다.

이 외에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작은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전 재산을 팔아 재활시키려는 부모의 눈물겨운 노력과 병신자식 때문에 산 자식 죽는다고 맞서는 큰아들이 등장하는 '브라보, 럭키 라이프', 27대 종손이면서 마흔 너머까지 장가 못 든 아들을 필리핀 여자와 결혼시키고 어미를 닮아 새까맣고 오종종한 손자를 품에 안는 이야기 '핏줄', 사지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중증장애인지만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를 위해 평생 가꾼 헛개나무 과수원에 매 맞고 사는 베트남 여인 호아를 숨겨주는 '천국의 열쇠' 등의 이야기가 산다는 일의 엄중함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며 독자의 가슴을 두드린다.

부산시민도서관 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