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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도 귀족. 미국의 만화가 새무얼 에르하트(1862~1937)가 그린 '강도 귀족(Robber Barons, 1889)'. 현대의 강도 귀족들을 중세의 악덕 영주들에 풍자하였다. |
산업혁명을 목격한 애덤 스미스나 데이빗 리카르도는 자본주의적 진보가 모든 계급을 더욱 풍요롭게 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면 할수록 노동자계급은 더 빈곤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자본가들이 생산수단 즉 자본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1839~1897)는 '진보와 빈곤: 부의 증진에 따른 산업불황과 빈곤 증가의 원인에 대한 조사(1879)'라는 책에서 같은 질문에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조지에 의하면 사회가 진보할수록 대중은 더욱 빈곤해지는 이유는 바로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남북전쟁(1861~65)이 막 끝난 당시의 미국은 철도 붐과 서부개척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서부로 몰려왔고, 땅값은 급속하게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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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조지 Henry George 1839~1897 |
특히 1869년에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되면서 서부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광적인 토지투기가 일어났다. 철도회사들은 철도를 운영하여 정상적으로 이윤을 획득하려 하지 않고 주식거래, 국유토지의 불하, 현금 보조금을 비롯한 갖가지 특혜로부터 불로소득을 얻었다. 정부는 철도회사들에 광활한 면적의 토지를 무상으로 불하함으로써 투기를 조장하였다. 이렇게 부를 축적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철도왕으로 불렸던 밴더빌트(1794~1877)이다. 하지만 그 대신 자급자족하면서 건전한 삶을 유지해 오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 토지로부터 내쫓기거나 일자리를 잃었다. 대중은 더욱 빈곤해지고 생활조건은 더욱 가혹해졌다. 조지는 이 모든 것이 토지에 대한 독점적 소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독학으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공부한 조지는 스미스가 그랬듯이 생산물의 가치는 지대와 이윤과 임금으로 나뉜다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지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윤과 임금은 줄어든다. 불황과 빈곤의 원인은 바로 토지의 독점적 소유와 그로 인한 높은 지대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처방으로 헨리 조지가 내놓은 것은 토지의 몰수가 아니라 토지단일세이다. 굳이 토지를 몰수하지 않더라도 토지로부터 나오는 지대를 전부 정부가 세금으로 환수한다면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의 사상은 경제학자들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나 시드니(1859~1947)와 베아트리체 웹(1858~1943) 부부와 같은 영국의 페이비안 사회주의자들―오늘날 영국 노동당의 모태가 된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요즘 빈번히 논의되고 있는 '토지 공(公)개념'이나 개발이익을 환수하여 공공복지를 위하여 사용하는 정책 등도 모두 헨리 조지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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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조지가 쓴 '진보와 빈곤'의 표지.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19세기에 출판되어 100년 후에도 읽히고 있는 책은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과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뿐이라고 말하였다. |
물론 헨리 조지의 시대에는 철도회사들만 온갖 악덕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대부분 남북전쟁에서 1차 대전(1914~18)에 이르는 이 시기에 그들의 부를 축적했다. 밴더빌트를 비롯하여 금융왕 모건(1837~1913), 석유왕 록펠러(1839~1937), 철강왕 카네기(1835~1919) 등이 바로 그들이다. 흔히 이들을 부르던 말이 바로 '강도 귀족(robber baron)들'이다. 강도 귀족이라는 말은 이들의 부가 합리적인 기업활동과 정당한 거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만과 협잡, 부정부패, 심지어는 범죄단을 동원한 노골적인 폭력과 범죄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강도 귀족들에게 고용된 폭력배들은 총기를 들고 다른 회사에 침입하고, 경쟁자를 협박하여 회사를 빼앗는 일도 예사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록펠러와 카네기는 그나마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함으로써 치부과정에서 쌓은 악명을 어느 정도 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강도 귀족들에게는 그만큼의 염치도 없었다. 강도 귀족들의 행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건은 1869년 8월 9일, 밴더빌트의 하수인이었다가 경쟁자가 된 금융투기꾼 제이 굴드(1836~1892)와 모건의 하수인이던 조지프 램지(1816~1894)가 철도회사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유혈사태이다. 굴드가 800명의 폭력배들을 동원해 열차에 실고 쳐들어가자 램지도 450명의 폭력배를 마주 오는 열차에 태우고 대항하였다. 두 열차는 충돌하여 전복하였고, 10여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은 끝에 전투는 램지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한 것은 바로 모건은행이었다. 지금도 미국의 10대 기업은 모두 록펠러의 것이거나 모건의 것이거나 또는 록펠러-모건의 것이다.
# 프랑수와 케네의 '경제표'
- 헨리 조지보다 100년 먼저 토지단일세를 주창한 중농학파의 거두
헨리 조지가 토지단일세를 주장하기 100여 년 전에 이미 같은 주장을 편 경제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중농학파(Physiocracy)'라고 불리는데, 그 어원은 '자연의 지배'라는 뜻이다. 중농학파를 만든 것은 루이 15세의 어의였던 프랑수와 케네(1694~1774·그림)와 그의 제자들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케네의 경제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만이 모든 부와 가치의 원천이라는 생각이다. 중상주의자들이 상업과 유통에서 부의 원천을 찾은 데 반해 중농주의자들은 노동과 생산에서 그 원천을 찾았다.
그러나 중농주의자들이 생각한 생산적 노동은 오직 농업노동에만 해당하였다. 케네는 진정한 부의 원천은 오직 자연과 토지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가 사회경제적 진보를 위해서는 산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반면, 케네는 농업의 발전과 농민생활의 개선이 프랑스의 현실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보았다. 한창 산업이 발전하고 있던 영국과 달리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여전히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두 사람은 중상주의를 비판하면서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공통점도 많다. 중상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스미스보다 먼저 부의 원천이 유통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점을 주장한 것, 또 경제적 자유주의와 토지단일세 등의 정책을 제시한 것 등은 모두 케네의 중대한 공헌이다. 케네의 제자들 가운데는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미라보(1715~1789)와 루이 16세의 재무장관이었던 튀르고(1727~1781) 등이 있다. 경제학의 역사와 발전에서 케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역시 '경제표(1780)'이다. '경제표'란 국민경제의 순환을 하나의 표로 정리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재생산표식'이나 현대경제학이 사용하는 '산업연관표' 등은 모두 케네의 '경제표'에서 아이디어를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케네의 '경제표'에 의해서 비로소 경제학이 과학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