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본에서 먹기 편하게 자른 조선인삼. |
- 사절단 통상 200근 정도 가져가
- 쇼군 등에 배분 선물 중 최고 인기
- 가격 따지지도 않고 앞다퉈 구입
- 서울서 70냥어치 사서 가져가면
- 300냥에 판매 4배 넘게 이익 남아
- 대마도번은 조선인삼 중개무역
- 에도에 전문판매점 설치하기도
- 1811년을 끝으로 통신사 단절
- 인삼 조달 어려웠던 것도 한몫
현재 한국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일본 상품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도 캐논, 니콘, 소니 카메라가 아닐까. 300~400년 전 통신사가 일본에 갈 당시, 일본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조선 물품은 무엇이었을까? 17세기 말에 작성된 쓰시마번(대마도)의 무역 장부를 보면, 조선에서 일본에 수출된 물품 가운데 80%가 중국산 비단과 비단실, 20%가 조선산 인삼이었다. 인삼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브랜드 상품이었다. 조선인삼은 무역, 일본 사절에 대한 예물, 통신사가 가져가는 선물 등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당시 인삼은 대부분 자연산으로, 평안도 강계 인삼이 유명했다.
| |  |
| 1819년 간행된 일본 도쿄 쇼핑가이드북 '강호매물독안내' 속의 조선인삼 광고로 불로장생에 좋은 약으로 광고되어 있다. 김동철 교수 제공 |
1727년 5월 25일 자 '승정원일기'에는 "일본의 풍속은 매번 병이 나면 곧 인삼을 복용하여 효과를 본다. 그러므로 값의 많고 적음을 논하지 않고 다투어 산다. 70냥에 서울에서 인삼을 사서 에도(도쿄)에 들어가면 반드시 300냥에 팔아넘긴다. 신(좌의정 홍치중)이 일찍이 왕명을 받고 일본을 왕래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대략 안다"라고 적혀 있다. 홍치중은 1719년 통신사 때 정사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인삼이 어느 정도 인기 상품인지를 잘 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인삼의 수요가 늘어난 것은 1660년대 이후이다. '동의보감' 등 의학 서적이 일본에 들어가면서 조선 약재의 수입이 증가하였다. '동의보감'은 1724년에 일본판이 간행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의학서였다. 쓰시마번은 1674년 에도에 조선인삼을 판매하는 점포인 '조선인삼좌'를 설치했다. 이 점포는 통신사의 관심을 끌었다. 1748년 통신사 때 종사관 조명채는 6월 13일 일기에 "길가의 큰 관문 위에 '조선인삼좌' 다섯 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물으니, 대마도의 피집(무역) 인삼을 모두 여기에 두고 매매한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통신사가 일본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일본 사절이 파견되었다. 이들에게 예물(예단)로 인삼이 지급됐다. 이 인삼을 예단삼(단삼)이라 부른다.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러 온 사행, 파견 연기를 요청하러 온 사행에는 각각 18근 12냥, 통신사를 모시러 온 사행에는 12근 12냥, 통신사를 모시고 온 사행에는 20근을 주었다.
| |  |
| 일본인이 인삼을 넣고 다녔을 인롱(약통).
통신사가 조각되어 있다. |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 많은 선물을 가지고 갔다. 인삼, 비단, 비단실, 모시, 호랑이·여우·담비·상어 가죽, 종이, 붓, 먹, 매, 말 등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인삼이다. 일본 국왕격인 막부 장군(쇼군)에게는 50근, 쓰시마번주에게는 5근, 막부 주요 관료에게는 3근을 주었다. 통신사가 가지고 가는 인삼을 '신삼(信蔘)'이라 부른다. 수량은 200근 정도였다. 신삼은 통신사와 물품이 결합하여 하나의 용어가 된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만큼 통신사가 가져가는 인삼은 중요한 존재였다.
일본인 가운데 인삼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 사람은 의원이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통신사가 갈 때 의원 2명이 갔다. 특히 1682년 통신사 때부터는 의원 외에 양의(명의) 1명이 더 갔다. 일본 의원들은 조선 의원과 만나 의학에 관한 많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1711년 통신사 때 오가키의 의원 기타오 슌포와 양의 기두문은 사삼(더덕)의 구별, 사삼으로 인삼을 대신했을 때의 효과 등에 관한 질문을 주고받았다. 1748년 통신사 때 나니와(오사카)의 의원 모모타 아타카와와 양의 조숭수는 나라 지역에서 재배되는 요시노 인삼과 조선인삼과의 비교 평가 등 다양한 내용을 주고받았다. 1763(4)년 통신사 때 에도의 의원 야마다 세이친과 양의 이좌국은 인삼 제조법 등에 대해 주고받았다. 야마다가 광동 인삼을 보여 주면서 물었을 때, 이좌국은 인삼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허리춤에서 인삼을 꺼내 보여주었다. 조선인삼을 본 야마다는 제조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아름다운 모양일 수 있느냐고 묻자, 이좌국은 인삼은 본래 아름다운 모양이라고 대답하였다. 특히 야마다는 "이좌국이 인삼 제조법 한 가지를 전해주었다. 별도로 기록해 집에 몰래 감추어 두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인삼 제조법이 일부 전해진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일본 의원들의 문답 속에는 조선인삼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18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조선인삼의 조달이 쉽지 않았다. 주요 수출품도 인삼에서 소가죽으로 바뀌었다. 인삼 조달이 어려운 상황에서 통신사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곤란했다. 1811년을 끝으로 통신사가 단절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로 조선인삼의 조달 문제를 들 수 있다. 조선인삼은 만병통치약인 천하의 명약이었다. 통신사가 가져간 최고의 선물인 조선인삼이 통신사의 단절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통신사는 일본 의학 등 일본에 대해 무엇을 궁금하게 여겼을까? 또 그것을 알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 통신사 역관 권흥식 자살과 인삼
- 인삼 밀거래로 모은 금·은, 짐 속에 숨겨 들어오다 들통…독극물로 스스로 목숨 끊어
| |  |
| 사람모양의 인삼
(일본 규슈국립박물관
사진엽서). |
인삼을 수입한 후 에도에서 팔면 4배 이상의 이익을 남긴다고 할 정도로 인삼은 인기 상품이었다. 통신사로 일본에 가는 것은 일확천금을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홍치중이 인삼 사정을 잘 안다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719년 통신사(정사 홍치중) 때 인삼 밀거래 사건이 일어났다. 통신사가 에도에 머물던 10월 7일 밤, 종사관 이명언의 막비가 고발하여 사건이 발각됐다.
제술관 신유한은 이날 일기에서 "종사관이 역관의 짐을 수색하였다. 권흥식의 짐에서 인삼 12근, 은 2150냥, 황금 24냥을 발견했다. 오만창의 짐에서 인삼 1근을 찾았다. 두 사람을 묶어서 자물쇠와 큰칼을 씌웠다. 쓰시마에 도착하면 처단하기로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밀거래의 주동자는 권흥식이다. 은과 황금은 인삼을 판 대가라고 생각한다. 밀거래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신유한은 12월 28일 일기에서 "역관 권흥식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흥식이 인삼 밀거래로 법을 어긴 것은 참형에 해당한다. 사신이 본국의 경계에 들어와서 참형을 집행할 것을 이미 조정에 보고하였다. 제가 알고 먼저 죽은 것이다. 죄는 용서하기 어려우나 매우 불쌍하다. 종사관이 배 위에 나와서 검시하였다. 여러 역관으로 하여금 초상을 치르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정사 홍치중은 '동사록'에서 오만창과 권흥식은 법을 어긴 사람이므로, 통신사 명단에서 삭제한다고 했다. 오만창은 귀국 후 동래부 감옥에 있다가 귀양을 갔다. 중국의 사마천은 '사기'에서 "탐부(貪夫)는 재물을 얻으려고 목숨을 건다"고 했다. 홍치중은 이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법을 어긴 것은 이와 같다고 했다. 일본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천하의 명약인 조선인삼은 천하의 독약이 되어 권흥식을 죽였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
공동기획: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 국제신문
협찬: YK Steel(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