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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즈오카 세이켄지 (淸見寺) 벽에 걸린 조선통신사 시판. 한태문 교수 제공 |
- 파견할 문신과 군관 뽑을 때부터
- 학문·시문창작 뛰어난 인재 선발
- 대마도 도착 순간부터 외교사행
- 자신의 문학능력·성취 검증 기회
- 일본 문사, 통신사 숙소에 장사진
- 글로써 대화, 배우고 우의도 다져
- 일본선 '필담창화' 내용 책자 출간
- 조선선 '사행록' 통해 日정보 접해
- 통신사가 양국 문물교류 일등공신
"오늘 통신사 군관을 뽑을 때 한갓 무예만 볼 것이 아니라 시문도 잘 짓는 자를 뽑아 아뢰라."
조선 전기, 성종이 통신사 군관을 뽑을 때 내린 명령이다. 어명을 받은 도승지가 후보자 두 명을 뽑아 올리자 성종은 '활 쏘기 구경'을, 또 한 번은 '일본으로 가는 사신행차'를 글제로 시를 짓게 하여 그 중 한 명을 군관으로 뽑았다. 게다가 시를 잘 짓지 못한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교체를 요구하자 사신을 곧바로 교체하는 일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성종은 왜 이다지도 유독 통신사 구성원의 문학적 능력에 신경을 썼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통신사와 일본 문사의 교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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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쇼코쿠지(相國寺)에 남아 있는 조선통신사의 한글 필적. |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통신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사, 부사, 종사관 등 세 사신은 학문과 시문에 뛰어난 문신 가운데 3품 이하를 가려 뽑았다. 그 가운데 일본인과의 교류가 주된 임무였던 제술관과 서기 대부분은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중인과 서얼 출신이었다. 이들에게 사행 참여는 신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답답한 가슴을 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일본인을 상대로 수천 수의 시를 남긴 제술관 신유한(1719년)과 남옥(1763년)을 들 수 있다.
통신사는 왕명을 받고 숭례문을 나서 하루에 약 20㎞씩 걸어 20여 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이 기나긴 노정은 그들에게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국토 산하의 참모습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노정에 포함된 지역의 수많은 자연과 명소, 풍토와 민속이 사행원의 사행록 속에 오롯이 자리 잡았다. 충렬사·해운대·몰운대·태종대·영가대·정묘·왜관·금정산성 등 부산의 명소 역시 통신사가 지은 시문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있는 문학공간으로 거듭났다.
통신사의 문학 활동은 '창화'와 '필담' 형식으로 일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창화와 필담은 말은 다르지만 같은 한자문화권인 양국 문사들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창화는 서로 지은 시문을 주고받는 것으로, 자신의 문학능력을 과시하고 개인적인 우의를 다지는 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그리고 필담은 서로의 관심사를 글로 써서 묻고 답하는 것으로, 화제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두루 걸쳤다. 이들 활동은 대체로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진 까닭에 묶어서 '필담창화'로 불리기도 한다. 필담창화는 미묘한 경쟁과 심리전을 동반하게 마련인 외교사행에 긴장 완화는 물론 서로 소통을 원활히 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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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1년 통신사 정사 조태억이 남긴 시문. 한태문 교수 제공 |
양국 문사의 문학 교류는 쓰시마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당시 일본의 문사들은 외국과의 교류가 제한된 가운데 학문·문화의 선진국으로 여기던 조선 문사들과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문사로부터 자신의 시문집이나 저서에 서문을 받거나 자작시에 관한 교정이나 비평을 받아 자신의 문학적 능력이나 학문의 성취를 검증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또 당시 막부에 대해서는 종속관계이되 선진학문과 기술 등 새로운 정보 독점에서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각 번(藩)의 욕심도 교류의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교토, 도쿄와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지역은 도쿄에 파견되어 있던 지역의 문사들까지 모두 불러들여 통신사와 만남을 가졌다. 심지어 오사카의 유명한 유학자는 통신사와의 필담창화에 대비해 제자들을 모아 합숙을 시키는가 하면, 자신을 조선의 문사로 설정하여 시를 짓게 하는 예행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통신사가 머무는 숙소는 날마다 찾아드는 일본인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조선의 문사에게 숙소는 노독을 푸는 공간인 동시에 그 지역 일본 문사들과 밤늦도록 시문창화를 하며 부대끼는 고통의 공간이기도 했다. 1719년 통신사 제술관 신유한은 거의 매일 일본인과 시문을 주고받는 자신의 처지를 "벼루와 먹 사이에다 머리를 구부리고 있으면서 신 것, 매운 것을 참고 삼키는 것이 마치 연자매를 돌리는 당나귀처럼 밟던 발자국을 그대로 밟는 것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와 일본문사가 나눈 필담 창화의 내용이 한 달 뒤 곧바로 '필담창화집'이란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통신사의 제술관이 괴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최천종 살인사건은 가부끼와 조루리 등 연극이나, 실록체 소설의 제재로 등장했다. 조선에서도 통신사에 참여한 조선의 문사들은 각종 '사행록'을 통해 자신의 사행체험과 일본에 대한 정보를 국내에 알렸다. 그 결과 통신사에 참여한 적이 없던 박지원이 '우상전'과 '허생전' 속에 일본에 대한 정보를 담았으며, 이덕무는 일본에 대한 백과전서라고 하는 '청령국지'를 편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오늘날 한일 양국에 전하는 각종 필담창화집과 사행록은 통신사를 통한 양국 문학교류가 얼마나 활발히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인 셈이다.
# 당시 조선사절이 지은 시문 2편 논 30마지기 거래
- 축문 태워 묻는 관습 어기고 쇼군 가보로 보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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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이 그린 조선통신사 시문 증답의 광경. |
당시 통신사가 지은 시문은 일본에서 어느 정도 가치를 지녔던 것일까? 몇 가지 일화를 통해 살펴보자.
1636년 통신사가 효고(兵庫)에 머물 때의 일이다. 부사 김세렴은 숙소의 뜰을 걷다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 2수를 벽에 썼다. 그런데 이튿날 그 시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숙소의 주인이 윗사람이 차지할까 봐 먼저 선수를 쳐 시를 도려내고 다시 도배를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윗사람이 결국 이 사실을 알고 시를 달라고 요구하자 숙소 주인은 200 냥을 받고 팔았다고 실토하였다. 당시 논 한 마지기 값이 3냥이었다고 하니, 흥에 겨워 가볍게 쓴 2수의 시가 논 약 30마지기의 가치를 지닌 셈이다.
1643년 통신사가 닛코(日光)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무덤에 제사를 지낼 때의 일이다. 원래 제사 때 사용한 축문은 태워 땅에 묻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일본 관리는 쇼군의 명령임을 내세워 그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통신사가 지은 축문은 일본의 경사이자 만대의 보물이므로 자손에게 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통신사가 지은 축문은 제사가 끝나자마자 밀봉되어 쇼군에게 바쳐졌다.
오늘날 통신사가 머물렀던 일본의 숙소 가운데 통신사의 시문으로 장식된 곳이 많다. 히로시마의 후쿠젠지(福禪寺)의 별관에 해당하는 대조루의 벽에는 통신사의 시문을 판각한 시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시즈오카의 세이켄지(淸見寺) 입구와 종각에 걸린 편액은 물론 경내에도 통신사 시판이 사방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아직까지도 통신사를 조공사로 일컫는 철없는 이들에게 꼭 한 번 관람을 권하고 싶은 장소이다.
이처럼 통신사를 통한 문학교류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날까지 짙은 묵향을 드리우고 있다.
한태문 부산대 국어국문과 교수
※공동기획 :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