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뛰어난 궤변론자- 세종은 유머감각을 곁들인 탁월한 궤변론자였다. 세종은 젊은 대신들과 논쟁을 즐겼고 논쟁에서 승리한 후에야 죄를 내렸다. 그러나 세종이 내린 죄는 근본적으로 살상을 금하는 관대한 처벌이었다. 사진제공 국립극단(촬영 심철민)

- 두 젊은 논리학자가 당도하다

너희에게 묻겠다,
임금이 있는 담장 곁으로
민심이 다가오는 것을 막는 게
진정 민심을 위한 것이더냐


논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빛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궁의 사람들은 일상인과 다른 옷을 입고 저마다 부여받은 논리와 명분을 지키며 평생을 수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궁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절제하고 개인적 욕망을 가두어 버린 사제여야 한다. 무엇을 위하여?

여기서 많은 관리들은 정신을 잃는다.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논리에 치열하고 명분을 고집해야 하는가? 치열한 논리와 고집스러운 명분이 범속하게 살아가는 일상인들의 빛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를 관리들은 자주 잊는다. 범속한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켜 버린 논리는 논리에 갇혀 버린다. 범속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가두어 버린 명분은 명분 그 자체에 집착한다. 이게 문제인 것이다.

	산대놀이를 즐긴 세종- 광대들에게 조롱 당하는 젊은 대신들. 세종의 측근에는 각 산업의 전문가들과 예술가들이 있었다. 세종은 산대놀이를 즐겼는데 세종의 광대들은 익살맞게 현실을 풍자하는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궁을 떠나 산과 강과 들녘을 가로질러 온 이유는 자연과 범속한 일상인의 세계와 접촉하기 위해서다. 내 몸에 피부병이 도졌다면 바로 내 몸이 자연과 통풍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고, 내 눈에 병이 깊어졌다면 내 눈이 드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고 깨알 같은 논리와 명분에 집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기 젊은 논리학자들이 온다.

온천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채 못 되었는데 장령 이사철과 정언 이휘가 관문을 들어서고 있다. 저들은 요즈음 한창 잘나가는 삼십대 말의 궁내 논객들이다. 이들 삼십대 말의 논리주의자들은 황희 맹사성 허조 등 원로 대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입장이라 지금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궁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늙은이들은 할 말이 있으면 아예 이들을 내세워 뜻을 전하기도 한다.

이사철은 전주 이씨 왕가의 종친이라 좀 더 교만하다. 그러나 집현전 박사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물이다.

김종서 황보인 조성강 세 늙은이들이 엇험, 으이그, 헤에~ 저마다 못 마땅한 헛기침을 뱉으며 노천탕에서 몸을 일으킨다. 어서 등을 돌려 저것들을 보지 않겠다는 심사다.

두 관리들이 도착해 임금 앞에 무릎을 조아리자 같이 목욕을 즐기던 관리들이 슬큼슬큼 탕에서 빠져 나간다. 결국 나 혼자 남을 때까지 두 관리는 침묵으로 시위한다. 나는 혼자가 되어도 노천탕을 나갈 생각을 않고 이대로 버틴다.

내가 탕을 빠져 나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이사철이 점잔을 빼며 나지막하게 아뢴다.

"여기 행궁은 서울 경복궁처럼 깊숙하지도 아니하온데 지금 광대를 시켜 풍악을 울리는 것은 신이 생각하기에 미안한 일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하다는 것인가?"

내 대답이 시큰둥하자 이휘가 재빨리 나선다.

"신 등은 혹 후세에 임금이 풍악을 너무 좋아 하시는 것으로 오해할까 염려되어 이와 같은 말을 올리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여기 행궁 주위가 너무 적막하다. 임금 행차 구경한다고 인근 백성들이 떠들면서 몰려들어서 저렇게 담장 밖에서 풍악을 울려 시끄러운 백성들의 시선과 소리를 풍악으로 막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정언 이휘의 말은 내가 잘 이해를 못 하겠다. 풍악을 좋아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말인가? 조선은 삼한시대 이래로 태조 태종에 이르기까지 임금이 행차할 때는 모두 풍악을 울렸다. 더구나 이같이 적막한 지방 행궁에서 풍악을 울려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어찌 의리와 명분에 어긋난다고 하는가?"

	이사철과의 논쟁- 세종의 사촌이기도 한 장령 이사철은 대사헌의 여론을 주도하는 검찰의 실세였다. 그러나 세종과의 논쟁에서 면박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이사철역 한상민)

약간 억지 섞인 내 응대에 장령 이사철의 언성이 높아진다.

"신이 사흘 밤낮을 말을 달려오는 중에 보니, 지난 가을 수해로 볏곡이 잘되지 못하였으므로 경기 강원 양도 백성들의 형편이 곤궁했습니다. 민심이 어수선한 마당에 풍악을 울리면 백성에게 미안한 일이지요. 더군다나 대신과 시종까지 히히닥거리며 임금과 같이 온천욕을 즐기는 모습도 미안한 일이구요. 원컨대 대신 시종들이 관문 노천탕에서 임금과 함께 목욕하는 행위를 중지해 주시고, 임금 시위가 소홀해질 수 있으니 풍악을 멈추고 민간인이 담장 곁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허락할 수 없다! 민심이 어수선하니까 풍악을 울리는 것이고, 민심을 모으기 위해 임금이 직접 백성들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 대신 시종들과 다 함께 목욕을 하는 것이다. 민심이 담장을 넘어 임금과 눈을 맞추고 접촉을 하는 것이 민심을 위무하는 것인가 흩어진 민심이 임금이 있는 담장 곁으로 오지도 못하게 막는 것이 민심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장령 이사철에게 묻겠다. 사흘 밤낮을 말을 달려오다 봤으니까 지방민들의 형편이 고단하다는 것을 알겠지. 그에 대한 구제책은 준비되어 있는가. 그대가 진정 백성의 고단한 삶을 걱정한다면 그 구제책을 가지고 와서 임금에게 요구를 하거라. 그래야 실행이 되는 법이다."

"강구해 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내가 그 구제책을 저기 서 계신 세 정승들에게 준비해 놓으라 했으니, 너는 임금이 내리는 교지를 가지고 가서 황희 대감에게 전하면 되느니라. 그래 사흘 밤낮 말을 달려 가지고 온 상소가 무엇이냐. 아뢰어라."

"이 상소는 의정부 육조와 대간의 뜻을 모아 상소로 간하는 것이니 공식적인 의례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럼 그러지 뭐, 주악을 올려라. 어전회의를 시작하겠다."

"지금 궁중 주악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향악을 올려라 여기는 향촌이 아니더냐."



전인귀가 신나게 풍악을 울리는 동안 나는 행궁 대청에 오르면서 검은 곤룡포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의정부와 육조 대신과 사헌부 사간원의 뜻을 모두 모아 가져온 상소라면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저 젊은 논객들이 가져온 상소의 논리와 명분을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어쩌면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이천 행궁이 유배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서울 의정부는 황희가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나의 논리가 대신들의 논리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황희는 당연히 대세를 따를 인물이다. 그러면 나는 어쩌면 영원히 서울에 입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무력으로 나를 밀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병조는 아버지의 군신 조말생이 아직 장악하고 있다. 아비는 무력을 쓸 줄 모르는 나를 위해 자신의 군신을 내 측근으로 붙이셨다. 조말생은 한때 황희를 천하에 사악한 간신이라고 몰아붙이면서 당대 가장 신망이 두터운 황희를 유배까지 보낸 인물이다.

그는 여론이나 토론과 합의 같은 것을 별로 믿지 않는 꼴통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설득시키지 못 한다. 그는 조선 중문의 수호신이 될 인물이다. 조말생이 누차 늙었음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내가 그를 붙들어 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를 지켜라.

지금 누가 내 등에 비수를 들이대는가?

일단 황희 맹사성 허조 세 정승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녹을 받는 관리의 영역을 넘어선 인물들이다. 청백함과 인문학자로서의 명성으로 그들은 이미 조선의 살아있는 신이 되어 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장승처럼 지키고 서 있다. 그래서 누가 임금이 되어도 그들을 함부로 다스릴 수 없다.

그들의 명예는 바로 그들의 힘이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입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 이편저편 가리면서 모험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한 자기 자신 편이다. 이미 3대에 걸쳐 주군을 갈아 치우면서도 꿈쩍하지 않은 그들이기에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충신 명신이 많은 시대일수록 임금은 의외로 외롭다.

그렇다면, 누가? 나를….

중국의 힘을 끌어들여 사대군주를 꿈꾸는 반역자는 누구인가? 내가 남몰래 진행하고 있는 독자노선의 길을 중국 조정에 누설하고 그들의 세력을 믿고 내 등을 떼밀어 내려는 놈이 있다면, 바로 그놈이 내가 타고 온 안여의 수레바퀴 나사를 느슨하게 풀어 놓았을 것이다.

바로 그 올가미에 지금 내 왼손이 걸려들었다.

장영실은 내 오른쪽 뇌의 상상력을 표현해 내는 왼손이고, 이순지는 내 왼쪽 뇌의 명령을 따르는 오른손이다.

나는 이 두 수족과 함께 조선의 표준시간을 측정해 내고 조선의 시계를 만들었다. 이 두 손발을 자르려는 작자는 누구인가?

어쩌면 내가 키우고 있는 집현전 선비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자식들 중에서도….

여기서 내 생각은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멈춘다.

나는 아버지의 전철을 절대 밟지 않을 것이다.

아들을 믿지 못하는 아비는 더는 아비가 아니다.

그런 아비 때문에 내가 임금이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대물림이 싫다.



안여가 부서지는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이천을 바로 서울로 되돌려 보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었다. 의금부에서는 내 명령도 없이 재빨리 장영실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의금부와 사헌부는 한통속이다. 사헌부에서는 이번 기회에 장영실 이순지 이천까지 때려잡을 기세로 달려들 것이다.

어떻게 된 판국인지 조선의 사헌부는 중국을 등에 업고 조선 관리가 아닌 것처럼 행세를 한다. 그게 사헌부의 자랑스러운 전통처럼 되어 있다. 그 사헌부가 지금 조선의 천문학자 수학자 과학자 음악가들에게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일단 올해 목표는 5월 단오절 전에 측우기를 서울 종루 한가운데 세우고 여름 우기가 오기 전에 각 지방 고을 관청 마당에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 백성들이 측우기의 오묘함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풍년을 찬양하고 요순시대를 꿈꾸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조선의 글을 가지는 것이다. 한글도 스물여덟 자 글꼴은 이미 다 완성해 놓았다. 올해 풍년이 들고 민심이 최고조에 이른다면 내년 중에 한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김종서가 직접 검정 곤룡포를 가져와 내게 입혀 준다. 김종서는 내가 검정 곤룡포를 입는 이유를 안다. 그래서인지 등 뒤에서 서늘한 긴장과 전율이 전해진다.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