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에 관한 수칙을 적은 부분에는 밑줄을 긋기로 하고, 시골살이와 농사일에서 저자가 캐낸 깨달음 등에는 괄호를 치기로 했다. 그랬더니 책을 읽자마자 책장은 온통 밑줄 투성이가 돼 버린다. 밑줄 긋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몸살-한승오 농사일기(강/1만원)'는 온통 삐뚤 빼뚤 볼펜으로 그은 줄들로 '환칠'을 하게 될 판이다. 괄호들도 만만찮다.

'빨리 물을 빼지 않으면 올해는 논을 갈아엎지도 못하고 농사를 지어야 할 판이다' '빨리 모상자에 볍씨를 넣지 않으면 싹이 웃자란다' '비닐하우스의 땅바닥이 기울어져 있으면 모를 고르게 키울 수 없다' '탈 없이 잘 크던 모에 이상이 생겼다.…이때 모는 어린 아기처럼 병도 많고 탈도 많다' '그 꽃을 그대로 두면 감자알이 작아진다고 한다. 꽃을 따내야 굵고 실한 감자알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꽃을 피어내는 힘을 감자알로 보내려는 의도다.'

누가 웰빙 라이프에 쾌적한 전원생활을 말하나. 농사일은 지켜야 할 것 투성이인 고된 일이다.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1년 농사 몽땅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때'이다.

'어쩌면 농사는 나의 시간, 인간의 시간을 버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비로소 변화무쌍하게 쉼 없이 흘러가는 자연의 때를 어렴풋이 감지하고 그를 좇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습성처럼 몸에 질기게 붙어 있는 인위(人爲)의 시간은 하루아침에 지워지지 않는 것. 내가 나를 끝없이 버리지 않으면 꿈틀거리는 욕망처럼 다시금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

농사꾼 한승오(47·사진)는 힘든 농사에 허리 펼 틈도 없으면서도 그 속에서 자연의 변화와 이치를 깨닫는 촉수를 지녔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도시의 폭력에 휘둘리고 있는 현대인들이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도록 묵묵히 쓴다. 그것이 그의 농사일기다.

저자 한 씨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 상경해 출판사를 운영하는 등 그 뒤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7년 전 도시의 삶을 버리고 스며들 듯 충남 홍성의 농촌으로 들어간 그는 이제 어엿한 농사꾼이 되었다.

'몸살'은 지난 2004년 펴낸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로 거친 경제논리에 침몰해 가는 농촌, 빠름의 문화가 파괴하는 삶의 정경들을 되돌이켜 보았던 그가 두 번째 펴낸 책이다. 웰빙 귀농 유기농 같은 '유행어'는 한마디 쓰지 않은 채 논밭에서 꼬박꼬박 쓴 농사일기만으로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을 깨닫게 해주는 묵직한 힘을 이 책은 지녔다. 멋내지 않고 소박하고 묵묵히 쓴 '농사일기'의 문체는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