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뻔했다. 그가 신화와 영문학 번역의 권위자이면서 동시에 중후하게 틀이 잡힌 소설가라는 사실을. 스리슬쩍 개인사의 장면으로 글을 시작해 재빠르게 광대무변 신화의 세계로 배를 돌려놓는 그의 솜씨 앞에서 문득 터지는 말은 "역시 이윤기!"다.

이윤기(사진) 씨가 오랜만에 내놓은 저서 '꽃아 꽃아 문 열어라'(열림원/1만2000원)는 우리 신화에 관한 에세이다. "가까이 있는 우리 신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먼 데 있는 서양 신화만 들고 판다는 질책을 많이 받았다." 이 씨는 책머리에서 이 글들을 쓰게 된 배경의 일단을 이렇게 밝혀 놓았다.

영화 한 편이 어지간히 성공했다 해도 그 성취가 2편, 3편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쉬운 노릇이 아닌 것처럼 신화의 권위자 이윤기가 새 책을 냈는데 그것이 또 신화에 관한 것일 때 거기에 위험과 부담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독자들의 기대는 한껏 높아져 있을 테고 전문가들은 "새로운 것이 없기만 해봐라" 하는 식의 고성능 감식안을 들이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꽃아 꽃아 문 열어라'가 독자를 강하게 끌어들이는 매력은 단순히 우리 신화를 소개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 데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 그리고 신화 자체에 대해 해박한 저자가 신화라는 큰 틀 속에 우리 신화를 끌어넣어 생선 살 발라내듯 그 의미와 자리를 탐색해 나가는 이윤기만의 시선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세계의 신화 속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신화적 실재'는 우리 신화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웅신화의 정신적 공통분모라 할 수 있는 '아비 찾기' '근본 찾기'의 특성은 '삼국유사'의 어떤 대목에서 출현하는가. 이런 탐색 절차를 밟아 에티오피아의 '파에톤 이야기'와 그리스의 '테세우스 이야기'가 '고구려 유리왕 이야기'와 만나는 대목은 독자에게 신화 자체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줄 만하다. 저자는 시베리아 무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아시아와 한국의 신화 세계를 '비교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 신화의 자리를 더욱 분명하게 매기기도 한다.

그는 "우리 신화는 그 수가 많지 않고 체계화되어 있지도 않아서 어수선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우리 곁에 우리 신화는 여전히 남아 있고 그 신화들은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세계 신화의 보편적 물음을 공유한다"며 우리 신화 찾기가 갖는 높은 가치를 강조한다.

"높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거룩한 우리 집 앞산에 발 들여놓기가 늘 망설여진다.…우리 집 앞 작은 산, 아내는 더러 오른다. 아내가 풀잎 같은 것을 따들고 내려와, 이거 산삼 아냐, 하고 물을 때면 나는 깜짝깜짝 놀라고는 한다."(머리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