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朴燕)은 생각했다. '나는 이교도들의 불가해한 다정(多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이 왕국의 이교도들은 태양의 뜨거움과 달의 차가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극단을 쉬이 넘나드는 저들의 병적인 활달이 나는 두려웠다'(본문 69쪽). 이 남자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이 남자, 박연의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 1595년생으로 네덜란드 사람이다. 1627년 네덜란드 상선 우베르케르크호를 타고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해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폭풍에 휘말려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는 동료 선원 2명과 조선 관원들에게 붙들려 한양으로 가게 된다. 26년 뒤 모국 네덜란드의 선원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왔을 때 그는 한양에서 내려와 통역을 맡았다. 그가 죽은 해는 조선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17세기 서양을 조선에 처음 소개한 벨테브레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다고 한다. 그나마 함께 조선에 왔던 동료 2명과 벨테브레가 동시에 등장하는 기록은 '하멜 표류기'가 유일하단다. 역사학자에게 불행한 일인 이 기록의 빈곤이 소설가에겐 행운이 됐다. 그 빈곤한 기록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소설계가 주목하는 젊은 작가의 한 명인 김경욱(사진)이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문학과 지성사·1만 원)을 펴냈다. '천년의 왕국'은 17세기 조선에 들어온 이방인 벨테브레와 그의 동료 2명의 삶을 문학적으로 복원한 소설이다. 최근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역사소설이라는 옷을 입고 있으되, 한 이방인의 내면을 치열하게 탐색해 들어가면서 '인간 존재의 조건'을 묻는 소설로서도 성공했다.

'천년의 왕국'은 벨테브레의 시선으로 생각하고 서술하는 1인칭관점을 취했다. 사실(史實)과 상상력이 서로 휘감기면서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이 장편의 행간에서는 어지간해서 작가 김경욱의 주관적 개입이 감지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는 이방인 벨테브레가 생각하고 벨테브레가 행동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완전히 창작한 인물인 요리사 예니켄, 청년 선원 데니슨은 강한 개성을 발휘하면서 소설의 긴장도를 높인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방인은 필연적으로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낯선 땅에 대한 전체적인 판단을 하려들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이방인으로서 벨테브레 일행의 그 같은 미세한 심리까지 잡아낸다. 작가는 "당시 사료, 조선을 여행한 외국인의 기록, 17세기 유럽의 자료까지 많은 자료를 공부해야 했다"고 말했다. 또 "신의 장난 같은 운명에 내던져져서도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고 길을 정정해가는 이방인의 모습은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도 지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