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임금 인상 릴레이 중이다.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정부 또한 기업에 적극적인 임금 인상을 주문하는 가운데 일본 최대 노동조합이 5% 넘는 임금 인상을 끌어 냈다.

일본 최대 노조 연맹 ‘UA 젠센’이 지난 1월 제11차 평의원회에서 임금 인상을 위한 2023년 종합노동조건 투쟁을 결정했다. UA 젠센 임원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UA젠센 제공

약 2200개 노조, 183만 명 근로자가 소속된 일본 최대 노조 연맹 ‘UA 젠센’은 지난 9일 사측과 임금 5.28% 인상에 조기 합의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UA젠센이 앞서 요구한 임금 6%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번 임금 인상은 41년 만에 최고치를 찍은 일본 소비자 물가 지수(1월 4.2%)를 앞섰다.

이번 임금 합의는 매년 봄 이뤄지는 노조 공동 임금협상인 춘투(春鬪) 임금 합의 발표가 있는 오는 15일보다 거의 일주일 앞서 합의된 것이다. UA 젠센이 사측과 조기 임금 합의에 도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해 10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회의’에서 올해 춘투에 대해 “물가 상승에 상응하는 임금 인상을 목표로 하고 각 기업의 실정에 따라 노사가 논의해 달라”고 주문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1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리를 동결하면서 “물가 상승 위험이 크지만 기업이 임금 인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필요한 시점까지 금융완화를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최대 경제인 단체인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또한 임금인상을 촉구했다. 도쿠라 마사카즈 경단련 회장은 지난달 26일 일본 자민당 당대회에 참석해 “물가상승에 뒤지지 않는 임금인상 추진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회원사에 촉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의 횡단보도에서 사람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연합뉴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패스트리테일링은 다음 달부터 일본 국내 직원 약 8400명의 연봉을 최대 40% 인상하기로 했다. 야나이 타다시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은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임금이 너무 낮다”고 강조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이에 대해 “유니클로 일본 국내 직원은 해외 직원과 비교하면 임금 수준이 열악하다”며 “패스트리테일링의 이번 인상은 세계 기준에 맞추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다른 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요타자동차는 최근 20년 가운데 최고 수준의 임금 인상을 단행했다. 도요타는 지난달 22일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를 받아들였다. 도요타 노조는 15개 직종·직급별로 세분화해 사측에 요구액을 제시했으며 젊은 조합원에게 중점적으로 배분했다. 다만 전체 조합원 평균 임금 인상 요구액은 비공개했다. 알려진 바론 사무직 조합원에게 월 9370엔(약 9만1300원)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혼다는 평균 임금 인상률 5%에 대졸 초임은 10% 인상했다.

노동자와 정부, 기업이 한목소리로 임금 인상을 외치고 있는 건 임금이 치솟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1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4.2% 올랐다. 반면 일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종업원 5인 이상 업체 근로자의 물가 상승을 고려한 1월 실질 임금이 전년 같은 달 보다 4.1% 감소했다. 8년 만에 최대 폭으로 줄어든 것이며 10개월째 실질임금이 하락하고 있다.

일본은 1990년대에 들어 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장기간 경기 침제 ‘잃어버린 30년’을 겪었다. 오랜 기간 디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하락)에 익숙해진 일본인에겐 고물가는 낯설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20년 마이너스 0.02%, 2021년 마이너스 0.25%를 기록하는 등 줄곧 마이너스 물가를 이어갔다. 그러나 지난해 들어 물가 상승률이 2.55% 상승했다.

전문가들은 물가 급등의 이유로 엔화 가치 하락을 꼽았다. 수년간 0%대 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과 달리 미국은 지난해부터 금리 인상 기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선 금리 인상이 필요하지만 일본은행이 마냥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도 어렵다. 정부 부채 문제가 있다. 일본의 국채는 이달 말 1043조 엔(약 1경142조 원)으로 예상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지난해 말 263.9%다. 금리 인상에 따른 부채 이자 부담 증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고물가 상황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일본이 임금 인상을 대책으로 내놓은 셈이다.

한국은행 동경사무소는 보고서에서 최근 경기 회복에 따른 정규직 유효구인배율(구직자 1인당 일자리 수) 상승세, 노동공급 확대 여력 감소, 물가 상승 확대로 과거보다 임금인상 압력이 확대됐다며 구조적 임금 인상(임금 인상→고숙련 인재 유인→기업생산성 향상→임금 인상)을 도모한다고 설명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사설에서 “생필품 가격 인상이 잇따르는 가운데 가계 소득 증가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개인 소비와 기업의 설비투자 동향도 임금 인상과 경제 성장의 선순환이 이뤄지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