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입니다. 해 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밤은 점점 길어집니다. 저물 무렵을 창밖으로 확인하게 될 때 시간을 보며 깜짝 놀라 ‘해가 이렇게 짧아졌나’ 중얼거립니다. 여름과 겨울은 흐리다는 색깔의 느낌이 다릅니다. 초겨울이지만 스산하고 우중충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일찍 등을 밝히는 날, 누군가를 생각하고 오랫동안 묻지 않은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그대에게 백지 위에 오랜만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 첫 문장을 적고 보니, 11월은 잎이 진 키가 큰 교목 두 그루가 빈 들판에 우뚝 서 있는 달 같습니다. 1과 1은 참으로 높고 그 사이가 무한히 넓다는 생각이 듭니다. 입동이 지나자 아득한 우듬지 위로 윙~ 윙~ 찬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윤5월이 들어 아직 음력으로 9월이 다하지 않았지만 소설(小雪)을 향해 걸어가는 11월은 겨울 초입입니다. 오래지 않아 ‘나래 푸른 기러기’가 돌아오고 그 끝을 따라 첫눈이 쏟아질 것입니다. 이룬 일 없는데 들이닥친 올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 것이라는 예감에 몸이 체온 안으로 둥글게, 둥글게 웅크려집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으레 가졌던 이삭줍기는 이제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좋은 말로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핑계가 되었습니다.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가 감을 온전히 달고 서 있습니다. 저건 분명히 버려진 붉은 슬픔입니다. 버려진 감은 제 가지에서 생살이 얼어 터지며 추운 겨울을 날 것입니다. 감 몇 알을 까치밥으로 남기던 ‘조선의 마음’은 사라지고, 통째로 남겨주어도 까치가 날아들지 않습니다.
김장 준비를 하는 집이 많습니다. 우리 집은 어머니 연세가 많아 작년부터 김장을 담그지 않습니다. 김장하는 날의 분주하면서 흥겨운 풍경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김장김치 한 포기, 갓김치, 총각김치, 청방김치를 구해다가 김치냉장고에 넣는 것으로 이른 김장을 마쳤습니다. 요즘 끼니때마다 아삭아삭한 김치를 즐기지만 무엇인가 큰 죄를 지어 벌 받을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런 11월이지만 ‘소춘’(小春)이 찾아올 걸 기다리며 즐거워집니다. 소춘이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잠시 봄이, 작은 봄이 찾아오는 자연현상입니다. 아니, 신의 선물일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위 전에 자연이 주는 ‘따뜻한 위로’ 같은 것입니다. 소춘은 개나리를 피우고, 진달래를 피웁니다. 목련을 피우고 벚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계절이 길을 잃었나, 철이 없구나 했지만 계절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소춘 무렵 올해는 어떤 선물이 올까 기다려졌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에서 ‘그들에게 더 남쪽의 낮을 이틀 더 베푸는’ 기도의 답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납니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일주일 전 정도 볕이 따뜻한 날이 계속됩니다. 첫 서리가 내린 뒤에 일어나는 이런 일기를 그곳에선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라고 부릅니다. 시애틀에 사는 오랜 친구가 있어 자주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느 날 인디언 서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반도나 시애틀이나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일까요, 겨울을 앞둔 한반도와 북아메리카, 일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에서 똑같은 자연현상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대가 무심하거니 바쁘다면 놓치고 마는 반짝 축복이겠지만요.
밀양 얼음골 사과를 요즘 수확하는 철입니다. 일교차가 심해야 소비자들이 ‘꿀’이라 부르는 별미가 사과 속에 많이 생기기에, 사과가 날이 추워지기 전까지 놓아둡니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친구는 그 꿀이 사실상 사과의 상처라고 합니다. 사과가 상하게 되면 그 부분이 가장 먼저 썩는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일종의 내상 같은 것이겠지요. 맛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사과에게 가하는 고통에 11월 얼음골 사과 한 알을 깎아먹으며 미안해집니다.
11월을 두고 슬기로운 인디언들이 만들어 썼다는 달력을 본 적이 있는지요? 인디언 달력은 부족마다 다른데 크리크족은 ‘물빛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체로키족은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테와 푸에블로족은 ‘만물을 거둬들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또 히다차족은 ‘강물이 어는 달’, 위네바고족은 ‘작은 곰의 달’, 키오와족은 ‘기러기 날아가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그중 제가 제일 마음에 드는 달력은 아라파호족의 11월입니다. 그들은 11월을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습니다. 이쯤 그 명명에 공감합니다. 11월이라고, 겨울이 온다고 웅크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며, 변하는 것은 없는 11월입니다. 어깨를 당당히 펴시길. 11월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시인·경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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