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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의 한국미술과 부산 <5> 미술인들의 피란살이-삶도 예술도 귀했던 시절

화구조차 귀한 전쟁통 … 붓은 놓치 않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19 19:22:07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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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의 '3·8선'. 김원의 화집에만 실려있는 작품으로 원본은 일반에 전시된 적이 없다.
부산 피란시절은 실로 난감한 세월이었다. 엄동설한에 물설고 낯선 부산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피란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마치 전쟁으로 인한 생활고와 인간의 죽음 앞에 무기력한 자신을 학대하듯 화가들은 그림에 탐닉했다. 박고석은 신미술 1호(1956년)에 발표한 '화단 10년의 공죄'라는 글에서 이 당시를 "부산 피란살이에서 미술인들은 오히려 진지하고 용기에 찬 활동을 보여준 것은 특기할 만하며 김환기 남관 박영선 이준 문신 황염수 천경자 권옥연 등의 개인전과 기조전, 후반기전, 토벽전, 신사실파전, 대한미협전 등 분기하는 미술활동은 이 나라의 미술사에 크게 남는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고 술회했다.

피란지 화가들의 삶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팍팍하고 힘들었다. 이상범은 당시를 "부산은 피란민 인파에 밀려 거리마다 사람이 득실거리고 먹을 것, 잘 곳이 없어 귀족티를 내던 사람이나 지게를 지던 사람이나 모두 같은 신세가 되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려다녔다.(중략) 우리는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면서 저녁이면 막걸리 몇 잔으로 때우고 사람들의 눈치만 살폈다"고 회상했다. 장욱진의 회고에서도 당시 화가들의 고단한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소주 한 되를 옆구리에 차고 부산의 용두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일과였고 폐차장의 폐차 안에서 잠자기 일쑤였다. 종군화가단에 들어 중동부 전선에 있던 8사단으로 가서 보름동안 그림을 그렸다. 종군 중에 그린 그림 50여 점이 부산에서 열린 종군화가단의 전시회에 전시했다."

화가들은 화구를 제대로 마련할 길이 없어 폐품을 활용하고 학창시절 그렸던 그림 뒷면에다 다시 그리는 등 험한 상황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박고석은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와 범일동에 자리 잡았다. 박고석의 집에는 한묵 손응성 이중섭 김환기 등이 어울렸는데 손 맛 좋은 그의 아내가 개천 위에 기둥을 세워 간이식당을 열고 카레라이스를 팔아 연명했다. 하지만 다음날 장사할 재료구입비까지 몽땅 털어 이들이 술로 바꿔 마시는 바람에 장사는 항상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박고석은 부산공고 교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시계 행상일을 하였다. 하지만 달린 식솔(?)들 때문에 늘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의 범일동 동천 바로 위에 아틀리에를 지어 사용했는데, 나무로 얼기설기 지었지만 운치있는 집이었던 것으로 김청정(전 신라대 교수)은 기억한다. 부산 최초의 아틀리에라는 이 작업실은 그가 상경하면서 김경에게 물려주었다. 당시 함께 교사로 일했던 작가로는 김경과 정규 그리고 건축가 엄덕문 등이 있었다.

원로화가 이준에 의하면 고희동은 피란 당시 칠성사이다 사장의 도움으로 영도에 큰 한옥을 빌려 기거했다. 이당 김은호는 피란 초기 초량 뒷골목 하수관 속에서 자는 등 별별 고생을 다 하다, 대한도기 사장이 마련해 준 수정동 집에서 살았다. 도상봉은 옛 부산시청 앞 미진상회라는 석유가게 2층에, 권옥연은 대신동, 이중섭과 김영길은 서면, 김병기는 초량, 남관은 영도이발관 2층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했다. 류경채는 서울대학교에, 김흥수는 이화여고에, 이규상은 모교인 경복고에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전봉건, 이철범 같은 문인들은 국제시장에서 에로잡지나 라이터 따위를 팔아, 이중섭은 철공소 땜질공원으로, 부두노동자로 전전해야 했다.

이즈음 화구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미국 문화원 문정관 부루노는 문화원 예산으로 일본으로부터 많은 재료를 들여와 50여 명의 화가들에게 이를 나눠줘 당분간 재료 걱정 없이 작업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당시 부산서 활동했던 이준 서성찬 김남배 임호 민백향 우신출 김윤민 김종식 등은 작가적 동지애로 피란온 화가들을 위해 거처와 양식을 마련해주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통에 대한민국 인구 반 이상이 운집한 부산에서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어찌 보면 화가들에게 종군화가증을 얻어 전선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가장 행복한 일인지도 몰랐다.

국민대 초빙교수·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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