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寂歷搖霞彩·적력요하채
가을이 오니 바위 골짜기가 서늘해지고(秋來巖壑冷·추래암학랭)/ 단풍잎은 일찍이 서리에 놀랐네.(楓葉早驚霜·풍엽조경상)/ 고요한 가운데 노을빛 같은 붉은 빛깔이 흔들리고(寂歷搖霞彩·적력요하채)/ 너울거리는 단풍 그림자는 거울 같은 물에 비치네.(婆娑照鏡光·파사조경광)
위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골짜기에 비치는 붉은 단풍’(영학단풍·映壑丹楓)으로, 그의 문집인 ‘하서집(河西集)’ 권 5에 수록된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 가운데 제44영(詠)이다.
가을이 깊어 가는 산골짜기의 풍경을 단 네 구절에 담아냈다. 찬 서리가 내리자 나뭇잎은 붉게 물들고, 바위 골짜기에는 단풍 빛깔이 노을처럼 번진다. 그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에는 붉은 단풍의 그림자가 비친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은 양산보가 조성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이다.
둘째 구절의 ‘풍엽조경상(楓葉早驚霜)’은 서리가 내려 잎이 붉게 물들었다는 자연현상을 마치 나뭇잎이 사람처럼 놀란 것으로 묘사한 표현이다. 셋째 구절의 ‘하채(霞彩)’는 노을의 아름다운 빛깔을 뜻한다. 붉게 물든 단풍을 하늘의 노을에 빗대었다. 마지막 구절의 ‘파사(婆娑)’는 나뭇가지와 잎이 너울거리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나타낸다. 단풍이 맑은 물에 비치면서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완성한다.
전남 장성 출신의 김인후는 김안국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40년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저작과 박사 등을 지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시강원에서 학문을 가르쳤으며,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지리산 화개골에도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쌍계사와 불일폭포로 이어지는 산길에는 붉고 노란 단풍이 내려앉고, 계곡의 찬 물소리는 한층 맑게 들린다. 바람이 불면 단풍잎 몇 장이 물 위로 떨어져 흘러간다.
단풍은 한 해의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낸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낙엽이 되어 땅으로 돌아간다. 아름다움이 영원하지 않기에 가을 단풍은 더욱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