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609> 아름답게 억새 핀 모습 읊은 조선 중기 문신 이정형

물가 억새꽃 흩날리니 눈발 속인 듯 어스름하네

  •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 원장
  •  |   입력 : 2026-10-06 18:59:48
  •  |   본지 16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 洲荻花翻雪欲昏·주적화번설욕혼

병들어 누운 채 해를 넘기며 홀로 문 닫고 지냈는데(病臥經年獨掩門·병와경년독엄문) / 오늘 아침 말을 채찍질하여 들 밖으로 나섰네.(今朝鞭馬出郊原·금조편마출교원) / 언덕의 단풍은 서리에 물들어 취한 듯 짙고(岸楓霜染濃似醉·안풍상염농사취) / 물가 억새꽃 흩날리니 눈발 속인 듯 어스름하네.(洲荻花翻雪欲昏·주적화번설욕혼)

위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1549~1607)의 ‘양근가는 길에’(楊根途中·양근도중)로, 그의 문집인 ‘지퇴당집(知退堂集)’에 들어 있다.

양근은 오늘날 양평 일대이다. 이정형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을 직접 겪었다.

가을이 깊어 가면 산과 들의 색깔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단풍이 들어가는 산기슭도 아름답지만, 바람 부는 강가나 들녘에서 한꺼번에 몸을 뒤척이는 억새를 바라보는 맛 또한 각별하다. 햇빛을 받은 억새꽃은 희게 빛나다가 바람이 불면 어느 순간 눈발처럼 흩날린다.

이정형도 어느 가을날 길에서 그런 풍경을 만났다. 그는 병으로 오랫동안 문을 닫고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모처럼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갔다. 오랜 병석 끝에 만난 바깥세상이었으니 눈에 들어오는 가을 풍경 하나하나가 새삼스러웠을 것이다.

“岸楓霜染濃似醉(안풍상염농사취)”, 언덕의 단풍은 서리를 맞아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의 얼굴처럼 붉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에서 “洲荻花翻雪欲昏(주적화번설욕혼)”라고 했다. 억새꽃이 바람에 뒤집히며 날리는데 마치 흰 눈이 내려 천지가 어스름해지는 듯하다는 것이다. 언덕에는 서리 맞은 붉은 단풍이 있고, 물가에는 눈처럼 흰 억새꽃이 있다. 시인은 가을이라는 말을 거듭하지 않아도 단 네 구절로 늦가을 들판 전체를 보여주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 어디든 억새가 한창이다. 지리산 필자의 차산 위에도 억새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어제 함께 한시를 공부하는 분들과 서원과 정자 등에 들러 시를 읽다 합천의 황매산에 가 억새를 구경했다. 햇살이 좋아서인지 억새꽃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400여 년 전 이정형이 바라본 물가의 흰 억새가 어제 필자가 간 황매산에서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부캉이가 남기고 갈 ‘북항 활성화·기후 대응’ 숙제
  2. 2아파서도, 부적응도 아니다…고교 자퇴 71% ‘내신 세탁용’
  3. 3부산 이전 1차 공공기관 4곳, 수도권에 여전히 495명 잔류
  4. 4세입자 보증금 안 준 前 금정구의원…추가 피해 확산
  5. 5민주항쟁사 한 폭에 담은 작가 “부마정신 헌법에”
  6. 6구·군 부단체장 출퇴근 의전 논란, 부산 5곳 폐지 결정…4곳은 “고수”
  7. 7부산행 KTX 하부 패널 파손…승객 300명 열차 갈아타
  8. 8부산국제영화제 11년 만에 ‘관객 20만’ 재돌파
  9. 9김도영의 KIA냐, 오스틴의 LG냐
  10. 10[정가 인&아웃] 지역현안 해결사 이헌승 국힘 부산 국회의원, 국제신문 회생에도 팔 걷어
  1. 1[정가 인&아웃] 지역현안 해결사 이헌승 국힘 부산 국회의원, 국제신문 회생에도 팔 걷어
  2. 2[속보] 김민석 "'조희대 탄핵 추진' 논의 공식화"
  3. 3이 대통령 "부마항쟁과 5·18, 헌법 담아내야" 국회에 개헌 논의 촉구 (종합)
  4. 4北, 잠수함발사 전략순항미사일 2종 시험발사(종합)
  5. 5이헌승 "국제신문 실질적 대주주 조사 미흡" 질타에 부산노동청장 "다음주 면담"
  6. 6李대통령 지지율 39%, 하락세 멈췄다…민주 36% 국힘 27%
  7. 7李대통령 “국무회의 비공개 동의못해…할말 못하는 국무위원 없다 확신”
  8. 8이혼소송 중 주소 노출…서울고법원장, 아내 살해 공무원 사건에 “제도개선”
  9. 9李대통령 “부마항쟁과 5·18 헌법 수록 개헌, 국회가 나서달라”
  10. 10이 대통령, 김지용 첫 출근에 "피아구별 없이 엄중 수사하길"
  1. 1부산 이전 1차 공공기관 4곳, 수도권에 여전히 495명 잔류
  2. 2부산TP 수장 중기부 승인…신임 기관장들 내주 취임
  3. 37.5% 폭락 ‘녹아내린 코스피’…7000서 7일 만에 5500으로(종합)
  4. 4누리호 탄 군집위성, 발사 14시간 만에 첫 지구 촬영 성공
  5. 5‘신뢰 시그널’ 없는 증시…외인 이달만 18조 투매
  6. 640돌 수산무역협회도 부산시대 연다
  7. 7부산 9월 취업자 9000명 늘었지만…'경제허리' 40·50대 3만명↓
  8. 8모건스탠리 “고물가 고착화 위험에 한은 내달 금리 올릴 듯”
  9. 9부산항에 석유 보세구역…북극항로 선박연료 생산·공급
  10. 10AI 투자 회의론 고개…글로벌 반도체주 ‘먹구름’
  1. 1부캉이가 남기고 갈 ‘북항 활성화·기후 대응’ 숙제
  2. 2아파서도, 부적응도 아니다…고교 자퇴 71% ‘내신 세탁용’
  3. 3세입자 보증금 안 준 前 금정구의원…추가 피해 확산
  4. 4민주항쟁사 한 폭에 담은 작가 “부마정신 헌법에”
  5. 5구·군 부단체장 출퇴근 의전 논란, 부산 5곳 폐지 결정…4곳은 “고수”
  6. 6부산행 KTX 하부 패널 파손…승객 300명 열차 갈아타
  7. 7고성서 세계적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하는 등산축제
  8. 8“장림항 레저보트 철수명령 정당” 대법 확정
  9. 9예고 임용강사·학원장 겸직, 전국서 부산예고 가장 높아
  10. 10부산 금정구, ‘야생화 및 국화 분재 전시회’ 개최
  1. 1김도영의 KIA냐, 오스틴의 LG냐
  2. 2득점은 킹, 리바운드는 롱…KCC 살릴 ‘믿을맨’ 찾았다
  3. 3자금 숨통 틔웠다…LIV골프 살아날까
  4. 4[뭐라노] 롯데, 이젠 성찰할 때
  5. 5프로야구 역대급 흥행에도 쪼그라든 ‘거인 팬심’
  6. 6인종차별 당한 엄지성…英 경찰 수사
  7. 7거인 3년 연속 7위…레이예스·한동희는 날았다
  8. 8황성빈은 첫 도루왕…끝까지 뜨거웠던 타이틀 경쟁
  9. 9한화, 새 사령탑에 류지현…3년 20억원
  10. 103년 無가을로 계약 만료…김태형 감독 운명은?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