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의 가는 풀잎 미풍에 흔들리고(細草微風岸·세초미풍안)/ 돛단배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네.(危檣獨夜舟·위장독야주)/ 별이 드리워진 들판은 트여있고(星垂平野闊·성수평야활)/ 흐르는 큰 강물은 달빛에 일렁이네.(月湧大江流·월용대강류)/ 어찌 글로 이름을 얻을 수 있으리(名豈文章著·명기문장저)/ 늙고 병들어 벼슬마저 쉬고 있네.(官因老病休·관인노병휴)/ 떠도는 이 신세 무엇과 같을 건가(飄飄何所似·표표하소사)/ 천지간 모래톱의 한 마리 갈매기로구나.(天地一沙鷗·천지일사구)

위 시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712~770)의 ‘나그네가 밤에 회포를 쓰다’(旅夜書懷·여야서회)로, ‘두공부집(杜工部集)’ 등에 실려 있다.

두보 특유의 침울하고 처연한 정서가 잘 드러난다. 그가 성도(成都)에서 출발해 장강(長江)을 따라 충현(忠縣)으로 나룻배를 타고 가던 도중 배를 대고 눈을 붙이기 직전에 지었다. 그는 54세 때인 765년 5월부터 성도에서 절도사 엄무(嚴武)의 비서 격인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벼슬을 얻어 3년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엄무가 죽자, 다시 가족을 이끌고 유랑에 나섰다. 이후 더는 벼슬을 얻지 못했다.

전반은 자연을 읊고, 후반은 처량한 심경을 술회한다. 하늘엔 별이 빛나고 강물엔 달이 일렁인다. 누구라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명성을 얻으려면 글재주가 뛰어나거나 높은 벼슬을 해야 한다. 하지만 글재주가 변변찮아 그걸로 이름을 얻기는 글렀다고 자신을 낮춘다. 낮은 벼슬마저 그만둔 신세다. 초라한 자신의 처지가 한 마리 갈매기와 다를 바 없다고 자조한다.

시인은 이룬 것 없고, 정착할 곳조차 없이 늙고 병든 몸으로 강물 위를 떠돈다. 이런 절박한 상황 때문인지 벼슬에 대한 미련이 시 속에 비친다. 시인의 생애 자체가 너무 쓰라리다.

필자는 서울에 일이 있어 왔다가 작은아들 조현진(趙顯振·32)·박지원(朴志原·31) 내외가 사는 12 층 아파트에서 자고 함께 지내고 있다. 베란다 저 앞으로 아파트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지만 숲이 많아 공원 위에 있는 느낌이다. 지리산 집을 떠나니 ‘나그네’가 떠올랐다. 두보의 위 시가 연상됐다. 떠돈 그의 인생 역정이 아프게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