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白髮有新莖·백발유신경
아이들이 첫눈 온다 알려(兒童報初雪·아동보초설)/ 늙은이를 놀라게 하누나.(却使老夫驚·각사노부경)/ 한 해가 저물고 있는 걸 아니(歲律知將暮·세율지장모)/ 여생은 얼마나 남았을까?(餘生問幾齡·여생문기령)/ 청춘 때 옛 벗 없어졌는데(靑春無舊伴·청춘무구반)/ 백발이 머리에 새로 자라누나.(白髮有新莖·백발유신경)/ 홀연 앞날의 일 생각하니(忽憶前頭事·홀억전두사)/ 이제는 죽음도 편안하리라.(從今歿亦寧·종금몰역령)
위 시는 조선 중기 문인이자 의병인 유집(柳楫·1585~1651)의 ‘첫눈’(初雪·초설)으로, 그의 문집인 ‘백석유고(白石遺稿)’에 있다. 유집이 노년에 첫눈을 맞아 심경을 읊은 내용이다. 시인은 아이들을 통해 첫눈이 왔음을 알았다. 첫눈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 겨울에 눈이 내린다는 건 한 해가 마무리됨을 알리는 징표이다. 노년 시인에게는 남은 생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잘 지내던 벗도 대부분 돌아가고 남은 사람이 이제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때가 되면 누구든 당연히 돌아가는 게 삼라만상 법칙이다. 그러니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다. 언제든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오언율시에 이런 내용을 함축했다. 엊그제 아침 일어나니 첫눈이 내려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마당엔 그렇게 많이 쌓인 건 아니지만 지붕과 차량 위에는 제법 수북했다. 앞의 산도 하얀 옷을 입었다.
지리산 산촌에서 60대 중반을 넘어서는 필자는 청년에 속한다. 어르신들이 집에서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옮겨야 할 때 필자를 부르시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아흔은 넘어서야 어른 대접을 받는다. 위 시를 지은 유집은 67세로 세상을 버렸다. 당시 그 나이면 노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해가 바뀐다는 것은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또 다른 현실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아이들은 첫눈이 내리니 좋다고 뛰어다니며 고함 지르곤 하지만 시인은 되레 놀랐다.
필자는 아직 젊어서인지(?) 첫눈을 보니 설레고 기분이 좋아 차 위의 눈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러면서 ‘이왕 내릴 바에는 눈사람이라도 만들 정도로 내리지’라는 아쉬움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