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秋生積雨中·추생적우중
새벽녘 서늘함 대자리에 들어오고(殘夜涼侵簟·잔야량침점)/ 창문이 비어 이슬 기운 스며드네.(窓虛露氣通·창허노기통)/ 사방의 이웃에 등불은 밝고(四鄰明宿火·사린명숙화)/ 고을 집집마다 새벽종 울려대네.(萬井動晨鍾·만정동신종)/ 엷은 새벽안개 너머 해 뜨고(日出疎煙外·일출소연외)/ 가을이 지루한 장맛비 속에 생겨나네.(秋生積雨中·추생적우중)/ 깊은 곳 살아 세수와 빗질 잊고 지내는데(幽棲忘盥櫛·유서망관즐)/ 손님 찾아오니 마지못해 단장했네.(客至强爲容·객지강위용)
위 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의 ‘晨興’(신흥·새벽에 일어나)으로, 그의 문집인 ‘춘정집(春亭集)’에 수록돼 있다.
변계량은 계속되는 장맛비 끝에 가을이 찾아오고 있음을 읊고 있다.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새벽녘엔 대자리가 서늘하다. 그가 사는 집은 골짜기 그윽한 곳에 있다. 평소엔 세면도 않고 살고 있다. 그런데 손님이 방문하니 어쩔 수 없이 용모를 단정히 하였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아열대 지방의 스콜처럼 퍼붓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엊그제 밤에 비가 너무 내려 ‘화개장터 일대가 3년 전처럼 또 물에 잠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였다.
어제 이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을에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전날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목압마을의 물 관리인이다. 부리나케 산으로 올라갔다. 진감선사가 수도하셨던 국사암 앞을 지나 삼신봉 방향으로 올라갔다. 길이 거의 없는데다 대숲으로 우거져 어둑하다. 마을 뒤 산에 멧돼지가 많다. 요즘엔 곰이 돌아다닌다고 마을 할머니들이 혼자 가지 마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지팡이로 바위를 치면서 아는 노래는 다 부르고 올라갔다.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이지 않은가.
취수원의 시설이 좀 원시적이다. 비가 퍼부었으니 낙엽이 많이도 씻겨 내려와 있었다. 선선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곰이 나타날까봐 두리번거리며 일을 했다. 내려올 때는 곰이 뒤에서 쫓아올까봐 뛰다시피 했다. 그러는 와중에 변계량의 위 시가 떠오른 것이었다. “가을이 지루한 장맛비 속에 생겨나네(秋生積雨中)”라는 시구를 평소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