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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90> 조선 후기 노비 시인 정초부의 시

강루에 홀로 기대 저녁밥 짓는 연기만 바라보네(江樓獨倚暮煙生·강루독의모연생)

  • 조해훈 고전인문학자
  •  |   입력 : 2023-07-23 18:48:52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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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새들 오래 알아 산사람(나의) 얼굴을 아는데(山禽舊識山人面·산금구식산인면)/ 관청 호적에 나무꾼 노비인 내 이름 없다네.(郡藉今無野老名·군자금무야로명)/ 큰 창고의 쌀 한 톨도 나눠주지 않으니(一粒難分太倉粟·일립난분태창속)/ 강루에 홀로 기대 저녁밥 짓는 연기만 바라보네.(江樓獨倚暮煙生·강루독의모연생)

위 시는 조선 영·정조 시대에 살았던 노비 시인 정초부(鄭樵夫·1714~1789)의 시 ‘쌀 한톨(一粒·일립)’로, 그의 유고집인 ‘초부유고(樵夫遺稿)’에 실려 있다. 이 문집에는 약 90수의 시가 있다. 조선 후기 뛰어난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幷世集)’에 정초부의 시가 무려 11수나 실려 있다.

그는 ‘초부(樵夫)’, 즉 나무꾼이었다. 경기도 양평에서 나무를 해 배로 압구정 맞은편 옥수동에 가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다른 시 ‘동호(東湖)’ 등으로 유추해 볼 때 그렇다. 노비 신분이다 보니 호적이 없어 관아에 가도 쌀 한 톨 얻지 못하였다. 절망한 그는 강가 누각에 올라 다른 집에서 저녁밥 짓는 굴뚝 연기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을 상상하니 마음이 저리다.

정초부에게 글과 시를 가르친 사람은 사대부 여춘영(呂春永·1734~1812)의 부친이었다. 정초부는 이 집에서 나무하고 잡일 하는 노비였다. 정초부보다 스무 살 적은 여춘영이 그를 노비 신분에서 풀어주었다. 정초부는 좋은 주인을 만나 노비 신분에서는 해방됐으나, 평생 나무꾼으로 살다 75세로 쓸쓸히 죽었다. 여춘영은 아들 둘을 데리고 그의 무덤을 찾아 제문을 지었다. 다음은 여춘영이 정초부의 무덤을 찾아 읊은 만시로,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軒適集)’에 들어있다.

“저승에서도 나무하시는가?(黃壚亦樵否·황로역초부)/ 낙엽은 빈 물가에 비처럼 쏟아진다오.(霜葉雨空汀·상엽우공정)/ 삼한 땅에 많은 명문가 있으니(三韓多氏族·삼한다씨족)/ 다음 생에는 부디 그런 집안에 태어나시오.(來世托寧馨·내세탁녕형)”

그제 오후 지인 두 사람이 목압서사를 방문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다 탁자에 놓인 한시집(漢詩集)을 보곤 “옛날에는 양반들만 한시를 썼습니까?”라고 물었다. 답변을 하다 정초부 이야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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