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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돌담길…속세 잊고 無心 되어 거닐다

전남 순천 조계산 불교 성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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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 고이 간직한 선암사, 승선교·대웅전 등과 계곡 물소리 더해져 시골마을처럼 아늑
지눌과 제자의 전설 서린 천자암 쌍향수…주암호 호숫가 자리 잡은 고인돌공원 운치 가득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이 전남 광양 백운산으로 가기 전 순천의 조계산에서 한 번 솟아오른다. 해발 887m의 조계산은 높이에 비해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하다. 정상에서 갈래 치는 능선들이 길고 완만하게 뻗어내려 조계산의 영역은 넓고 깊다. 조계산이 잘 알려진 것은 산세보다도 천년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은 덕이다. 전국 3대 사찰 중 승보사찰로 보조국사 지눌이 조계종을 처음 연 송광사와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한 선암사, 이 두 개의 큰 절을 품은 불교의 성지가 곧 조계산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선암사와 천자암의 쌍향수, 주암호 옆의 고인돌공원 등 조계산 자락을 다녀왔다.
   
전남 순천 조계산 동쪽 자락의 맑은 계류가 흐르는 계곡을 올라가면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된 승선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승선교(昇仙橋)의 의미가 바로 체감될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마을 골목길 돌듯 편안한 고찰 선암사

조계산 동쪽 자락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거슬러 한참을 올라간 곳에 선암사가 자리한다. 주차장과 매표소를 지나면 계곡을 따라 1㎞ 남짓 걸어가는 길이 여느 고찰, 대찰과는 다른 선암사만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포장조차 되지 않은 그늘진 길을 졸졸 물소리를 들으며 여유롭게 걷다 보면 어느새 승선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주문과 종각을 지나고 만세루 옆을 돌아가면 마당에 연등을 건 아담한 크기의 대웅전이 보물 동탑과 서탑을 품고 있다.

   
승선교를 지나 선암사로 들어서는 일주문.
선암사는 법당과 요사채 등 스무 동 넘는 건물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밀집해 조계산을 배경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입구의 삼인당 못을 비롯해 여러 연못을 잇는 인공적인 물길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건물과 건물을 나누는 담장은 어느 시골 마을의 돌담길을 떠올리게 한다. 미로 같은 구조라 예사로 다니다 보면 못 보고 나오는 게 많아진다. 색 바랜 법당만큼이나 구석구석을 장식한 나무들도 일품이다. 겹벚꽃을 비롯한 꽃나무가 한두 그루씩 담장 옆을 지키고 있다. 한 달쯤 전에 왔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초록이 가득한 지금도 나쁘지 않다.

선암사는 큰 사찰로는 거의 유일하게 조선 후기 중창 이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70년대 초부터 이어져 온 소유권 분쟁이 선암사의 보존에는 일등공신이었다. 선암사는 태고종 스님들이 수행하는 사찰이지만 소유권이 조계종에 있다. 소유권이 태고종에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있었지만 송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스승과 제자의 사연 담은 천자암 쌍향수
   
두 그루가 마치 스승과 제자처럼 마주 보는 천자암 쌍향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선암사를 보고 되돌아 나와서는 송광사의 ‘보물’ 천자암 쌍향수를 만나러 간다. 조계산 서쪽 자락의 송광사가 아닌 남쪽 자락 산 중턱의 작은 암자인 천자암이 목적지다. 선암사에서 시계 방향으로 돌아 낙안읍성 옆을 지나면 송광면 사무소에 닿기 전 이읍마을로 들어서서 좁디좁은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한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이 절로 나오는 길을 힘겹게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여기서 코가 땅에 닿을 듯한 급경사 산길을 500m 오르면 비로소 천자암 마당에 올라선다. 쌍향수 아래 차가운 약수가 고생을 달래준다.

   
지눌 스님을 비롯해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암자인 천자암은 특징적인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나란히 선 두 그루 곱향나무는 조금 과장하면 선암사나 송광사 같은 큰 절집을 보는 것 못지않다. 천연기념물 제88호인 이 쌍둥이 나무는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다. 곱향나무는 추운 데 사는 나무로 백두산 부근에 자생한다. 천자암의 쌍둥이 곱향나무는 남한에서는 유일하다. 용틀임하는 듯한 형상의 이 나무에는 고려 때 천자암을 창건한 보조 국사 지눌 스님과 제자 담당 국사의 전설이 전해온다. 천자암의 자리를 정한 두 스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쌍향수로 자랐다는 것이다. 두 그루 곱향나무가 서로 의지하는 듯, 바라보며 있는 모습이 정말 서로 배우고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망향의 그리움 품은 고인돌공원

   
고인돌공원에 복원 전시한 북방식 고인돌.
천자암을 내려와 주암호로 방향을 잡는다. 장안천을 따라 송광사로 가다가 곡천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다리를 건너면 채 5분도 가지 않아 호숫가에 자리 잡은 고인돌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1991년 완공된 주암호 건설로 수몰된 순천 보성 화순 3개 시·군 9개 면에서 발굴된 고인돌 24곳 400기 가운데 140기와 청동기 시대·신석기 시대 움집, 선돌 등이 6만 ㎡의 널찍한 야외전시장에 자리 잡고 있다. 고인돌 무덤 조성 과정과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고인돌 전시관도 있다.

다채로운 형식의 고인돌이 넓은 잔디밭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 나무 그늘로 걸으며 산책하듯 관람하기 좋다. 입구의 대형 고인돌을 지나와 복원한 도자기 가마 쪽으로 가다 보면 크지 않은 나무 앞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송광초등학교 45회 동창회 이름으로 된 표지석에는 주암댐에 잠긴 모교를 떠올리며 새긴 ‘그 그리움과 애닯음을 한데 모아, 이곳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나니, 세월 흘러 그늘 지면 쉬어 가리라’는 글귀가 있다. 학교는 송광면 사무소 근처로 옮겨갔지만 옛날 다니던 학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짠하게 느껴진다. 고인돌공원은 수몰지역의 고인돌만 옮겨온 곳이 아닌 주민들의 ‘망향의 동산’이었나 보다.


# 근처 가볼 만한 곳

- 금둔사지 삼층석탑·낙안읍성 등 조계산 주변길 따라 명소 수두룩

   
낙안읍성 서문에서 북쪽으로 도는 방향의 성벽.
조계산의 물길은 서쪽으로 주암호, 동쪽으로 상사호로 흘러든다. 승용차로 조계산 자락을 찾는다면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내려 857번 도로를 따라 남하해 선암사를 찾으면 된다. 이곳에서 천자암 쌍향수를 보러 가려면 857번 도로를 타고 고개를 넘어간다. 이 길에는 일대를 무대로 한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에서 따온 조정래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고개를 넘어가자마자 나오는 오공치 전망대에서는 낙안읍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낙안읍성으로 내려가기 전에 나오는 금둔사에는 보물 제945호와 946호인 금둔사지 삼층석탑과 금둔사지 석조불비상 등 두 점의 보물이 있다.

금둔사를 지나 성북삼거리에서 58번 도로를 타면 곧 낙안읍성 성벽이 보인다. 서문이 있는 곳이다. 통상 순천 시내에서 오면 낙풍루가 있는 동문으로 들어선다. 서문에도 매표소는 있지만 분위기는 한결 조용하다. 서문으로 들어서면 김소아 가옥, 김대자 가옥을 지나 낙민관 자료전시관과 동헌, 낙민루를 바로 만난다. 주민이 사는 초가집과 관아 건물을 둘러보고 성벽 위로 올라서서 한 바퀴 돌아보면 낙안읍성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 외서면에서 1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천자암과 고인돌공원을 둘러본 뒤 18번 국도를 타면 송광사 앞을 지나 호남고속도로 주암·송광사IC로 연결된다.

글·사진=이진규 기자 ocean@kookj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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